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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불임금과의 전쟁/ <상> 벼랑끝에 내몰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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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불임금과의 전쟁/ <상> 벼랑끝에 내몰린 사람들

입력
2012.03.2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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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전기 끊기고 가정 파탄… 이게 죽도록 일한 대가인가요"

박진태(가명ㆍ47)씨는 경력 20년이 넘는 목수다. 열심히 일해 인천 남동구에 20평 남짓한 빌라 한 칸을 얻었지만 건설 경기에 따라 일이 들쭉날쭉, 그야 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왔다. 지난해 12월부터는 경기 광주시의 5층짜리 빌라 신축 현장에서 한달 가량 일했다. 하지만 임금이 나오지 않았다. 건설업체에서는 "건축주에게 받아야 줄 수 있다"고 하고, 건축주는 "업체에 이미 돈을 다 지불했다"고 했다.

가족들과 구정 쇨 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박씨는 받기로 한 임금 480여만원 중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요금을 못 내 가스와 전기가 끊겼고, 친척들 볼 면목이 없어 전라도 고향에도 못 갔다. 부인과 초등학교 1, 6학년 두 딸과 어두컴컴한 냉골에서 떡국도 한 그릇 못 먹은 채 설을 지냈다. 며칠 후 부인은 딸들에게 "엄마가 돈 벌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부인은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임금 체불은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떼인 돈을 받겠다고 원청과 하도급업체 사장을 쫓아다니고, 지방노동청에 신고를 하고, 광주시청 경기도청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밀린 돈 받으러 다니느라 새 일을 못 구하다 보니 생계는 점점 더 어려웠다. 박씨는 "오죽 답답했으면 난생 처음 동사무소에 가서 '영세민이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며 "그런데 형제들도 있고 가족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함께 돈을 떼인 동료 10여명과 3개월간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박씨는 지난 주 업체로부터 임금의 절반인 24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 동안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생활비를 쓴 탓에 대출금과 이자를 갚는데 고스란히 다 들어갔다. 박씨는 "알고 보니 업체 사장은 돈이 있는데도 대부분 노동자들이 체불 임금을 중간에 포기하니까 고의적으로 안 준 거였다"며 "이 도둑놈 때문에 우리 가정이 파탄 났다"고 하소연했다.

박씨와 같은 현장에서 일한 동료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목수 김모(54)씨는 돈이 없어 결국 대학생 아들을 휴학시켜야 했다. 김씨는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얼마 전에는 나한테 용돈을 주더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체불된 임금, 즉 체임 문제로 연간 30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체임은 우리나라 노동계 전 업종에 걸친 고질병으로, 고용노동부에서 명절마다 집중 단속을 하고 각종 예방대책을 내놓고 있는데도 발생 건수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체불 신고 건수는 20만건에 달했고 체불액도 1조원이 넘었다. 제도를 잘 몰라 신고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훨씬 더 큰 규모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업종별 체불 건수는 제조업이 20%를 차지해 전 업종 중 가장 많았고, 도소매 및 음식 숙박업(10.5%) 건설업(9.3%)이 뒤를 이었다. 특히 건설업은 하도급에 하도급이 이어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중간 하도급 업체가 돈을 떼먹는 경우가 흔해 상습적인 체임에 시달리고 있다.

20여년간 굴삭기 기사로 일해 온 신동수(가명ㆍ50)씨도 건설업계의 이 같은 왜곡된 구조의 피해자. 신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19일까지 인천시 도시철도건설본부에서 발주한 온수~부평 7호선 연장 구간에서 일을 했지만 신씨와 계약을 맺은 하청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임금으로 받은 어음이 종이조각이 됐다. 사기업보다는 믿을 만하다는 지자체가 발주한 공사였는데도 6개월간 일해서 번 돈 6,200만원을 날리게 된 셈이다.

건설노조가 지난해 1월부터 1년 동안 전국 346개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건설기계 체불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도로개발공사와 같은 정부기관이나 지자체 등에서 발주한 공공 공사현장의 체불이 전체의 70%가 넘는다.

신씨는 "인천시에서 사업을 딴 원청업체가 지자체로부터 어음을 받았을 리 없는데 하청업체를 거쳐 우리가 돈을 받을 때는 3,4개월짜리 어음으로 지불된다"며 "결국 발주처와 원청이 공사 감독은 철저히 하면서도 임금 지급에 대해서는 전혀 감독권을 행사하지 않아 밑바닥에서 일하는 우리들만 생계가 곤란해진다"고 말했다. 결국 20년 간 기사로 일한 끝에 신씨의 수중에 남은 것은 경기 부천시 집 한 칸과 빚 2억원이다.

외국인 아르바이트생 등 노동 약자의 체임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2년 전 취업비자(E4)로 한국에 온 네팔인 브로밀라(36)씨는 하루 20시간씩 한 달을 꼬박 일하고 10원 한푼 받지 못했다. 그는 월 17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경기 용인시의 한 사슴농장에서 녹용 만드는 일을 했다. 아침 7시에 시작된 작업은 쉬는 시간도 坪?새벽 2,3시까지 이어졌고 일이 없을 때는 다른 염소농장에서 일을 했다.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한 브로밀라씨는 한 달만에 일을 그만뒀지만 업체 대표는 "돈 못 준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임금이나 퇴직금을 떼이는 것 외에 훨씬 교묘한 체불 행태도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법으로 보장된 수당을 주지 않거나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 등이 모두 체불에 해당한다. 박성호 민주노총 법률센터 노무사는 "사업주가 악질적으로 주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우리나라의 복잡한 임금체계 때문에 수당 등을 제대로 주지 않는 등 사람들이 몰라서 못 받는 체불액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체불 건수, 선진국의 6배 당국 부실감독·솜방망이 처벌 탓

우리나라의 임금 체불은 선진국보다 5,6배는 많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미국 일본 등의 체불 건수는 연간 2만8,000여건으로 지난해 19만3,500여건을 기록하며 사상최대치를 돌파했던 우리나라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선진국 대부분이 임금체불 통계조차 제대로 작성하지 않을 만큼 체불이 거의 없는 수준인데, 우리는 체불 사업주를 형사처벌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계속되는 체임의 원인으로 3가지를 꼽았다. 먼저, 회사가 어려워지면 직원 임금에 앞서 다른 비용부터 지불하는 사업주의 임금에 대한 안일한 인식이다. "회사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우리나라 특유의 온정주의에서 비롯된 문화 때문에 직원들도 한 두 달 월급 밀리는 것은 참는 분위기다. 박성호 민주노총 법률센터 노무사는 "임금은 단순히 노무에 대한 대가가 아닌 한 가정의 생계 문제이기 때문에 회사가 망해도 노동자 임금이 지급 1순위가 돼야 하는데 현실은 반대"라고 꼬집었다.

고용부의 부실한 감독과 사업주 중심의 결정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신고된 체임을 조사하기도 바빠 사업장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포괄임금제 등 체계가 복잡하면 대부분 사업주 입장에서 판단을 내린다는 비판이다. 한 지방노동청 관계자는 "근로감독관들이 체임을 예방하고 감독해야 하지만 신고 사건 처리에 매몰돼 사업장 관리는 손 놓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체임 혐의가 드러난 사업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다. 지난해 신고된 체임 사건 중 사법처리 된 사건은 26.8%(5만2,049건)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대부분 벌금형으로, 구속 기소되는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직원들에게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지 않더라도 사업주는 체불 임금의 15~20%에 해당하는 벌금만 내면 돼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최미숙 노무법인 노사 노무사는 "노동사범에 대해 벌금을 많이 부과하고 죄질이 좋지 않은 사업주는 구속시키는 등 검찰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함에도 경제사범이라는 이유로 너무 약하게 처벌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지역 지방노동청에서 일하는 한 근로감독관은 "노동자들이 자신은 임금을 못 받아 생계를 위협받는데 노동청 조사를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사업주를 보면서 우리에게 '왜 처벌하지 않느냐'고 항의할 때도 많다"고 전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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