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갱도의 깊이 878m. 탄광이 카지노로 탈바꿈된 폐광촌 공간의 급격한 변화처럼 이 갱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막장 인생도 달라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십 수년째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인생의 봄을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 시대 현실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있던가.
연극‘878m의 봄’은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해 현실을 성찰한다. 그래서 선택한 공간적 배경은 강원 정선. 한때 일확천금의 허망한 꿈을 품은 막장 인생이 모인 탄광이었고 그보다 더한 욕망이 꿈틀대는 카지노로 변한 곳이다. 여기에 타워크레인에서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의 이야기가 극의 또 다른 한 축으로 더해진다.
주인공은 카지노 딜러 우영(박윤정)과 PD가 되어 고향을 찾은 준기(김종태)다. 준기는 타워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에 관한 3부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만 외압으로 일부는 방영을 못했다. 준기는 갱도 붕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용만의 묘를 이장하려고 왔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용만의 동료였던 우영의 아버지 근석(박상종)과 기철(이종윤)은 준기의 방문을 썩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연극은 용만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가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이들의 모습을 관조한다.
연극은 상당히 정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의 피해자는 있으되 명확한 가해자가 없다. 가해자로 보이는 근석이나 우영도 기실 거대한 압력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피해자일 뿐이다. 진짜 가해자는 왜곡된 자본주의 논리에서 비롯된 배금주의 사회 풍조다.
전형적인 갈등 구조의 희곡과 비교해 이야기는 다소 밋밋하다. 그 대신 현실과 초현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로이 오가도록 한 연극의 형식이 관객의 감성을 고조시킨다. 다만 잦은 장면 전환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 점은 아쉽다. 마치 채탄 작업을 하듯 광부 복장의 제작진이 소품을 나르는 모습은 인상적이지만 거듭되는 반복은 몰입의 방해 요소다.
결국 연극은 나지막하게 객석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저들의 삶을 흩어 놓은 이 사회 현실에 분노할 줄 아는가. 지질한 삶 속에 박제돼 서로를 긁고 할퀴는 그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은 아닐까. 작 한현주, 연출 류주연. 4월 8일까지 남산예술센터. (02)758-2150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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