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나눈 밀담이 공개돼 파문이 커지고 있다. 외교를 국익이 아닌 11월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는 비난이다.
26일 서울에서 90분간 진행된 미러 정상회담이 끝나고 기자들이 몰려올 즈음 두 정상은 얼굴을 맞대고 대본에 없는 말을 속삭였다. 마이크가 켜져 있는 것을 모르고 나눈 은밀한 대화였다.
오바마가 “모든 이슈 중에 특히 미사일방어(MD) 문제는 이번 (11월 열리는) 대선만 끝나면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나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게 중요합니다”라고 하자, 메드베데프는 “예, 알겠습니다. 당신이 말한 여유, 당신을 위한 여유를 이해합니다”라고 영어로 답했다. 오바마가 “이번은 나의 마지막 선거입니다. 선거 이후에는 좀 더 융통성을 둘 수 있습니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속내를 보이자, 메드베데프는 “이 얘기를 블라디미르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편에 있습니다”라고 화답했다. 더 이상의 얘기는 녹음되지 않았지만 네 차례 오간 대화는 90분 회담보다 더 오바마의 속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3선에 성공해 5월 대통령에 취임할 푸틴은 “더 이상 미국의 예스맨이 되지 않겠다”며 특히 MD체제는 주권 차원에서 강경 대응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오바마의 발언은 이런 푸틴에게 강경대응을 미국 대선 이후로 미뤄달라는 굴욕적 요청이나 마찬가지라고 언론들은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나를 재선시켜주면 협상에 더 좋은 기회가 있다는 것’으로 오바마의 말을 요약하고 “세계 지도자가 국내에서 직면한 정치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한 보기 드문 장면”이라고 지적했다. 공화당 경선 선두주자인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국민은 오바마가 재선 이후 보여주겠다는 ‘융통성’이 무엇인지 알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도 “오바마가 무슨 의미로 유연성을 언급했는지 빨리 해명을 듣고 싶다”고 트위터에 적었다. 벤 로즈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이 나서 “양국에서 선거가 있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올해 MD 문제의 돌파구를 찾는 게 어렵다는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재선가도에 두고두고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이다.
오바마는 작년 11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도 뒷담화가 노출돼 곤욕을 치렀다. 그때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지목해 “그를 참을 수 없다, 그는 거짓말쟁이다”고 비난하자, 오바마는 “나는 그런 그와 매일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파문을 불렀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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