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통해 방송을 내려받는 팟캐스트는 거창한 시설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작년에 '나는 꼼수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다양한 팟캐스트들이 등장했다. 기존의 방송과 신문사까지 팟캐스트에 나섰다. 팟캐스트가 인기를 누리면서 저널리스트도 연예인만큼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스타저널리스트가 팟캐스트에서 나온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 바탕에는 언론의 본령인 특종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중이 뉴스를 대중문화만큼이나 재미있어 하고 그 가능성을 팟캐스트가 열었다는 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작년에 시사주간지 <시사인> 의 주진우 기자가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로 떴다면 올해는 시사평론가 김종배(46)씨가 스타저널리스트에 등극했다. 그는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를 통해 민간인 사찰 기록은폐의 전모를 새롭게 파헤쳤다. 검찰이 수사했지만 일부 공무원의 과잉충성 정도로 덮어버린 이 사건을 그는 당시 사찰기록 은폐를 담당했던 장진수씨(전 총리실 공직윤리관실 주무관)를 독점 인터뷰해서 민간인 사찰에 청와대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연일 신문과 방송이 따라오면서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오마이뉴스 창고를 개조한, 바깥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서 녹음 때면 주변 사람을 다 쫓아버린다는 2평 남짓의 팟캐스트 녹음실에서 그를 만났다. 시사인>
_왜 이슈를 털어주는 걸로 정했어요?
"제가 뉴스브리핑을 오래 했잖아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매일 주요 뉴스를 전해주고 분석하는 뉴스브리핑을 11년간 담당했다.) 뉴스브리핑으로 먹고 살면서 보니까 뉴스에 빈 구멍이 있어요. 대부분 스트레이트(사건발생기사) 중심으로 가는데 본격적인 분석해설이 없다, 아니 있는데 실시간 분석이 없다,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요즘 사람들은 포털을 통해서 뉴스를 보고 듣는데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쌓이기만 하니까 스트레이트는 어마어마하게 접하는데 그 뉴스를 어떻게 갈무리해서 관점을 세울 것인가 이 과정에서 구멍이 있어요. 그래서 실시간 분석을 해주면 좋겠다 하고 몇 년전부터 계속 주변에 그런 방송을 해보라고 이야기를 해왔어요. 2009년에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4개사와 공동으로 각당 대표 청문회 같은 걸 기획했을 때도 텍스트는 따로 쓰더라도 인터넷 방송은 4개사가 함께 해보면 조중동 종편에도 대항할 수 있고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반응이 없었어요. 작년말에 오마이뉴스에서 팟캐스트를 해보자 하길래 '원데이 원이슈'로 매일 한 가지 이슈를 정해서 그걸 탈탈 털어주는, 아주 상세히 분석하고 해설해주는 방송을 하게 된 거지요. '원데이 원이슈'로 잡은 건 보통 공중파 인터뷰가 길어야 10분, 15분이죠. 제가 출연자로 나가서 얘기를 하려면 다 못하고 나온 느낌, 청취자로 들어도 뭔가 끝을 안 본다는 느낌이어서 어차피 한정된 인력으로 모든 이슈를 다루는 건 무리니까 하루에 한 이슈만 잡아서 뽕을 빼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_한 가지 이슈라고 해도 두 명이 매일 하자면 엄청 부담인데요.
"그게 다른 공중파(방송)처럼 국회의원 장관 모시고 이런 거라면 매일 못하죠. 저희 출연했던 분들은 그렇게 높은 사람들은 아니에요. 대신 내공 있고 '구라빨'(입담) 있고 최소한 이 건에 대해선 꿰고 있는 사람이 나오자 그래서 섭외도 잘 풀렸어요. 전관석이라고 오마이뉴스 기자인 친구와 둘이 아이템 의논을 함께 하고 섭외는 관석이가 하고 인터뷰는 제가 해요. 우리는 퇴근길 팟캐스트를 표방하기 때문에 오후 5시 반에는 올려야 하거든요. 역순으로 계산을 해봤더니 2시에는 인터뷰를 해야 하겠더라고요. 실제로는 출연자 사정에 따라서 인터뷰 시간은 들쭉날쭉해요. 팟캐스트는 생방송은 안되거든요. 그래서 아주 죽겠어요. 최근 몇 달간은 주말에도 쉰 적이 없어요. 보통 아침 7시에 홍대 앞에 있는 개인사무실에 가서 6개 신문 다 보고 또 제가 책 쓰는 게 있어서 거기서 원고 쓰다가 이털남 준비해서 점심때 여기 넘어와요. 이털남 끝나고 다시 사무실 가면 오후 5시쯤 돼요. 거기서 글쓰기 강좌 준비해서 7시부터 9시까지 강좌하고 끝나면, 사람들이 뒷풀이를 워낙 좋아해서 11시에야 끝나요."
_이털남이라서 일부러 수염도 기르는 거예요?
"수염은 기르는 게 아니라 평상시에 수염을 안 깎고 다녀요. 곱슬수염이라 전기면도기가 안 들어요. 일회용 면도기 밖에 못쓰는데 맨날 베고 피나고 그래서 공개된 모습으로 나갈 때만 수염을 깎았어요. 이게 평소 모습이에요."
_원래 언론을 전공했어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왔어요. 88년에 학교를 졸업했는데 운동권(그는 주사파가 아닌 NL이었다고 했다.)이어서 기성언론사로 들어가는 것은 변절이라고 생각했어요. 관제언론이라고 불렀으니까. 당시에는 운동권이 대학을 졸업하면 노동현장이나 농촌현장에 투신하는 것이 필수코스였는데 저희 집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제가 3남1녀 가운데 셋째인데 대학 간 건 저 밖에 없어요. 그래서 선배들한테 3년만 시간을 달라고 그랬어요. 일단 가족들 먹여 살려놓고 투신하겠다. 그래서 광고사업을 한번 해볼까 하다가 안됐고 그래서 배를 타려고 했어요. 고향이 대천인데 고향에 수산고등학교가 있었어요(현재 충남 해양과학고). 고향 형들은 대부분 수고 나와서 원양어선 타고. 그때 신설동에 외항선원 모집 인력회사가 쭉 있었어요. 인천 수봉공원에 있는 교육원에서 반공교육까지 받아야 승선허가증을 받아요. 승선허가증을 받고 사조를 탈 거냐 동원을 탈 거냐 하는 판에 알음알음으로 선배가 연락을 해와서 기자협회에 가서 일이나 해라, 그래서 기자협회보 기자가 되었어요. 89년 1월에 들어가서 딱 2년 있었어요. 빚은 냈지만 안산에 가족들 살 연립 하나를 마련하고 노동현장으로 갔어요. 남쪽에서 대기업 사내하청을 했는데 거기서도 버는 족족 집으로 다 부쳤어요. 그때 정말 배 많이 곯았어요."
_92년 즈음해서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노동현장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나오던 때가 왔지요.
"저도 1년만에 나왔는데 그래서는 아니고 어느 날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아버지가 입원하셨다고 당장 올라오라고 해요. 머리쪽에 암이 생겼어요. 병원비도 벌어야 해서 노동현장에서 나왔어요. 아버지는 92년 10월에 돌아가셨어요.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도 '노동현장 들어갈 거냐'고 비웃을 때라 어느 회사 사사(社史) 만드는 일에 잠시 몸 담았다가 민언련 중심의 선거보도감시연대에서 일을 했어요. 이거 끝나고 전교조가 만드는 월간지 우리교육에서 4년 정도 일하다가 97년 1월에 (당시 언론노조의 기관지격인) 미디어오늘로 갔지요."
_미디어오늘에서 편집국장도 꽤 일찍 됐고 오래 했지요?
"거기서 특종도 많이 했어요. 김영삼 대통령 말기에 (아들) 김현철 국정농단사건이 많았는데 그 김현철의 사단 중에 광화문팀이라고 있었어요. 그걸 추척해서 보도했고 이도성 동아일보 정치부장이 세풍자금 받은 거, 이현락 동아일보 주필이 땅투기 한 것도 미디어오늘이 처음 썼지요. 보도비평도 많이 했고요.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은 98년부터 했는데 눈에 문제가 생겨서 2001년 6월에 그만 뒀어요. 96년 겨울에 녹내장이 왔는데 미디어오늘에 입사하고 3개월만에 망박박리까지 갔어요. 녹내장이 오면 두통이 장난이 아닌데 그걸 모르니까 두통약만 먹었어요. 병원에 갔을 때는 오른쪽 눈 시신경이 60%가 죽고 망막이 찢어지는 바람에 수술을 했는데도 합병증으로 백내장도 왔고. 데스크를 하려면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어야 하니까 도저히 못하겠다 하고 그만 뒀지요. 오른쪽 눈은 지금 거의 실명 상태에요. 왼쪽 눈도 시신경이 60%는 죽어있어요."
_보통 언론사에서는 사회부 경찰기자(사건기자)를 해야 촉이 생겨서 특종을 잘한다 그러는데 사회부 훈련은 전혀 안 받았지요.
"언론사 로테이션 시스템이 기자가 사건에 관심을 가져도 한 가지에 매달릴 여유를 주지 않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민간인 사찰 건은 장진수씨가 억울하다고 해서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중이잖아요. 상고 이유 보충서에 최종석(전 청와대 행정관)이 시켰다 하는 게 다 나와요. 기자들이 지속적으로 파고들 의지가 있었다면 포착은 했겠지요. 실제로 <한겨레21> 은 그걸 파헤치는 중이었는데 저희가 먼저 터뜨렸고요. 장진수씨가 그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2010년 10월쯤에 제보를 받았어요. 그때 저는 '시선집중'에서 뉴스브리핑은 하고 있었지만 딱히 적도 없고 매체도 없던 때라 특종을 한다기보다 뭐가 사실이냐가 궁금했어요. 그때는 장진수씨가 거절해서 못 만났는데 이번 2월에 연락을 해와서 만났지요. 처음에는 저도 이 사람이 어디까지 말을 할 것인가, 이 사람은 제가 어디까지 보호해 줄 것인가 서로 간을 봤지만 이제는 뭐든 이야기하지요. 민간인 사찰의 피해자인 김종익씨와, 장진수씨 저 이렇게 셋이 조그만 곳에서 토론회 같은 것도 구상하고 있어요." 한겨레21>
_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브리짓 바르도의 개고기 인터뷰를 성사시킨 게 프로그램을 살렸다던데.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2000년 10월에 생겼는데 저는 그보다 앞서 엄길청 교수가 하던 '아침을 달린다' 때부터 뉴스브리핑을 했어요. 작가회의에도 참석하면 돈 준다고 해서 기획에도 참여했지요.(웃음) 브리짓 바르도는 프랑스문화원에 전화번호 알아서 연결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섭외를 성공한 사람은 박창섭 작가니까 그 사람 공이지요. 그보다는 DJ 말기때 개헌론이 등장했을 때 본격시사를 해보자고 김근태 김덕룡 등 '잠룡'(대권후보)들을 모두 불러서 개헌을 주제로 집중토론을 했어요. 당시 김덕룡씨가 인터뷰 후 방송에 불만이 있다면서 인터뷰 전문을 비서들한테 글로 옮기라 하고는 국회출입 기자들한테 돌렸어요. 덕분에 이 프로가 확 떴지요. 주요 인물 인터뷰가 나가면 속기록이 붙는 것도 거기서 유래했어요. 나중에는 방송이 제도화했고요."
_팟캐스트가 어찌 보면 언론사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라진 스타저널리스트 시대를 다시 살려줬어요.
"스타저널리스트는 보도로 신뢰를 쌓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스타논객보다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사회에서 논객은 진영논리에서 정파적인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스타가 되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저널리스트적인 훈련을 쌓고 스타가 된 사람이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전하는 정보를 통해 한국사회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발전에 기여한다고 봐요. 다들 언론의 계도기능이 끝났다고 하지만 정보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는 지금 정보를 분류하고 종합하고 판단해주는 언론의 역할은 다시 중요해졌어요."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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