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는 걸까. 여야 정치권의 공천 과정을 지켜본 유권자들의 눈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올해 선거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이런 구태를 반복하진 말았어야 했다. 특히 비례대표 공천의 경우 대통령 선거에 대비한 '박근혜 치어리더'와 야권 실세들의 '계파 나눠먹기'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난해 무상급식 이슈를 계기로 터져 나온 국민들의 복지 열망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1% 승자독식 체제가 한계 상황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민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재벌을 비롯한 소수 특권층의 반칙과 불법을 몰아내고 공정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복지 확대를 통해 자유무역협정(FTA) 등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탈락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경제민주화의 실현이다.
성장 만능주의와 부자감세로 대변되는 보수 여당도 올해 초 정강정책을 대폭 고치면서 경제민주화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국민들은 변화의 열망을 수용하겠다는 다짐으로 이해했고, 이번 선거에서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는 인물들이 대거 공천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국민들의 인적 쇄신 요구를 철저히 짓밟았다.
새누리당 공천자의 면면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담론과 경제민주화 주장이 허구에 불과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장과 감세를 중시하고 복지 확대에 반대하는 시장보수 일색이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이만우 고려대 교수는 MB정부의 '7ㆍ4ㆍ7 성장전략'을 입안하고 복지 확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한 감세론자인 탓에, 새누리당 내부에서조차 새로운 정강정책과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주 비대위원에서 물러난 김종인 전 의원이 "말로만 경제민주화를 얘기하지 이를 실천할 사람들은 없는 거꾸로 된 공천"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야당의 공천 결과도 유권자들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친다. 민주통합당은 재벌개혁과 중소기업ㆍ자영업자 보호 등 경제민주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과연 이런 정책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진용을 갖췄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된다. '보수는 결과를 중시하고, 진보는 과정을 중시한다'라는 비유도 있지만, 과정에서조차 자기 사람을 심으려는 계파 이기주의만 요란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진보진영 일각에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서민경제 활성화를 내세우며 10년 동안 집권하고도 오히려 시장자유화를 적극 추진하면서 양극화만 키웠던 민주화 세력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천에서 탈락한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가 "(민주통합당의) 공천 과정을 보면 경제민주화는 안중에도 없는 사기극"이라고 비판한 데 대해 많은 유권자들이 공감하고 있음을 야당 지도부는 알기나 하는 걸까.
그렇다고 정치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 권력욕에 물든 기성 정치인들의 이전투구와 경제민주화 철학과는 거리가 먼 공천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지만, 혁명이 아닌 이상 경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정치뿐이니 어쩌겠는가.
국민의 99%가 불안에 떠는 나라, 노인의 45%가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 중인 나라, 100만명의 빈곤 아동이 존재하는 나라, 상시 해고 위험에 노출된 저임금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50%를 넘는 나라‥.
이런 야만 사회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정치인들이 밉고 혐오스럽더라도 희망의 끈까지 놓을 수는 없는 법.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정당과 후보자를 뽑아야 한다. 그러려면 여야의 주요 정책과 공약들을 꼼꼼히 읽고 냉정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4월 11일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자.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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