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지음ㆍ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328쪽ㆍ1만5000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들의 이데올로기를 '냉소주의와 가족 내지 의사가족 단위의 이기주의의 조합'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어느새 낙오자의 대열에 서야 한다는 불안감에 붙들려 공동체가 조각나고 개인이 움츠러드는 것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에서 미국의 현실도 바로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고, 외면하고, 움츠러들거나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미국 정치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학자 토크빌이 감탄한 미국의 역동적인 민주주의는 이제 옛말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비통한>
그는 빛 바래가는 미국 민주주의의 모습을 되돌리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 집, 저축을 잃고 시민들이 정치와 경제 시스템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했다. 테러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편집증으로 고통 받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는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고 개개인은 고립됐다. 무심한 상대주의, 정신을 좀먹는 냉소주의, 전통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 이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저자는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공격을 꼽았다. 국가적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다른 나라 사람을 죽이는 이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사실 미국은 별로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서 말하는 마음은 '인간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상태 전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질 때 체념하지 말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집단적인 열광이나 사적인 안위, 소비주의에 탐닉하지 말고 내면의 풍경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퀘이커 신자인 그의 말이 너무 종교적이어서 알쏭달쏭하면 이렇게 바꿔 말해볼 수 있다. 사회적 연대와 공공적 책임은 개인의 내면적 성찰에서 생겨나 공동체 안에서 심화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성된 용기는 공동체를 넘어서 사회의 변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 링컨 대통령이 말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분리와 모순을 너그럽게 품어 안으면서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서 정치적 긴장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정치 뉴스를 숨 가쁜 속도로 보여주면서 결국 대중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만드는 대중매체에 저항해야 한다. 생활 가까이 있는 가족, 동네, 교실, 일터, 종교 공동체 등에서 쟁점에 관심을 가지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당신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아버지나 어머니, 배우자의 역할, 공무원이나 회사원, 자영업자로 뭐든 수입이 되는 일들일 것이다. 그런데 '시민'은 그 목록에 들어 있는가.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블로그에 마지막 남긴 '오로지 참여하는 자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을 그의 유언에 대한 각론으로 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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