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은 탁월한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논객이었다. 20대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신문기자를 지냈다. 광복 후에도 그의 논리는 학자 출신 정객들을 앞섰고, 저술들에 담긴 사상의 폭도 상당히 깊고 넓었다. 그의 학력은 일본 주오(中央)대학과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1년씩 다닌 게 전부다. 그런데도 탁월한 논객이 된 것은 두뇌가 출중하고 일본 유학 중 김찬(金燦)이라는 인물을 만나 많은 사상서를 읽은 것, 유학생 모임에 나가 토론에 능숙해진 것 때문이었다.
엿장수 도쿄 유학생
죽산은 23세 때인 1921년 여름 도쿄로 유학을 갔다. 죽산은 자신을 일본 유학길로 이끈 소년시절 친구 유찬식(劉燦植)과 자취를 했다. 유찬식과 경성고보 동창으로 함께 도쿄물리학교에 다니는 홍순복(洪淳福) 이성구(李性求), 그들보다 대여섯 살 많은 주오대 법과생 김찬도 함께였다.
죽산과 김찬은 일제 강점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투쟁했지만 다른 동숙자 3명은 조용히 살았다. 3인은 유학 전 조선 최고의 학교인 경성고보에서 3·1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구속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항일투쟁은 접었다. 유찬식과 이성구는 교육자로 일했다. 둘이 함께 전북 고창고보를 민족정기가 높은 학교로 만들기도 했다.(미당 서정주 시인이 이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홍순복은 친일행위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기소되었다.
죽산은 일본 도착 두 달 만에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편입시험에 합격했다. 2학년 2학기에 편입했으면서도 어렵지 않게 학교 진도를 따라 갔다.
일제 강점기 유학생들 가운데 이 학교 출신은 많다. 독립투사 박열(朴烈) 조만식(曺晩植), 문인 이기영(李箕永) 박영희(朴英熙) 홍효민(洪曉民), 교육자인 김성수(金性洙) 장이욱(張利郁),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신익희(申翼熙),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安益泰), 뒷날 죽산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된 임원근(林元根) 김단야(金丹冶) 등이 이 학교를 거쳤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 일부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사회주의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국 독립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죽산도 열심히 그 분야의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거의 무일푼이라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네 사람의 동숙자들을 따라 엿장수를 했다. 뒷날 그는 <내가 걸어 온 길> 에서 자신의 판매실적이 가장 나빴다고 썼다. 내가>
죽산은 김찬에 끌려들었다. 김찬은 군수를 지낸 관료의 아들로 경성의전(京城醫專)의 전신인 경성의학강습소를 다니다 중퇴했다. 도쿄로 와서 공장 노동자 생활도 했고 러시아 연해주에 가서 동포 독립운동가들을 만난 일도 있었다. 이 해 여름에는 러시아혁명 현장을 시찰하고 왔다.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나돌아 다니는 사람이었으나 카리스마가 강하고 유물사관, 자본론 등 공산주의 경제학에 해박했다. 김찬은 죽산의 관심을 공산주의 쪽으로 이끌었다.
"공산주의는 유산계급에 대한 질투나 증오가 아니라 무산계급에 대한 연민과 애정에서 출발했어. 일본은 타도의 대상이야. 제놈들 독점자본의 활로를 찾으려고 우리를 침략했어.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은 절대로 우리 편에 서지 않아."
그는 죽산을 조선인고학생동우회 모임에 데리고 갔다. 죽산은 거기서 김판권(金判權) ․ 원종린(元鍾麟) 박열 김약수(金若水) 등을 만나 토론을 벌였고, 그들과 더불어 조선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이 해 말, 그는 입학시험을 치르고 주오대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엿장수로 학비를 벌며 1분 1초를 아껴 공부하는 한편 김찬이 권하는 책들, 부하린의 <공산주의의 abc>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등 기초적인 사상서들을 독파하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 <사회발전사> 등 전문서적들을 정독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낭만적 이상주의의 색채가 짙은 아나키즘을 버리고 공산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유학생들의 토론회에도 자주 나갔다. 독서와 토론의 깊이와 폭은 더 넓어졌고 그는 점차 탁월한 논객으로 변해갔다 사회발전사> 국가와> 공산당선언> 공산주의의>
하지만 죽산에게 마음 놓고 공부할 시간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학기를 마쳤을 때 김찬이 실천적 참여를 선언했던 것이다.
"3‧1 운동 이후 국내 지식층은 급격히 사회주의로 기울고 있어. 이제 조국의 현실 속으로 뛰어들 때가 됐어. 또 지금 레닌 정부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해외의 두 한인 공산당 그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피 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어."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1918년 1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국적을 가진 남만춘(南滿春) 김철훈(金哲勳) 오하묵(吳夏黙) 등이 공산당 한인지부를 만들었다. 이들이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몇 달 뒤인 1918년 6월 이동휘 등 강제합방 전후 망명한 지사들이 동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 초대 총리가 되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자 중심 멤버들도 이동했다. 이들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렸다.
두 파는 청산리 대첩 후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단의 행로를 놓고 다퉜는데, 이로 인해 결국 독립군단이 궤멸당하는 자유시 참변을 초래했다. 그리고 레닌이 지원한 40만 루불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김찬은 그런 상황을 설명하고 덧붙였다.
"나는 두 그룹을 파악하고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손잡는 일을 맡을 테니까 자네들은 귀국해서 국내 상황을 장악하도록 해."
죽산을 비롯한 후배들은 김찬의 제안에 동의하여 유학 중단 및 현실 참여에 합의한 뒤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1922년 여름이었다.
국제 공산주의자 대회 참가
죽산은 귀국하자마자 공산주의 이론가로 떠올랐다. 10월에는 소비에트 연방 부리아트몽골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베르후네우딘스크(현재의 울란우데)에서 열릴 한인 공산주의자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지명되었다. 함께 참석하는 사람은 윤자영(尹滋瑛) 정재달(鄭在達) 정태신(鄭泰信) 등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각자 출발이었다. 죽산은 경성역에서 경의선 열차를 탔다. 북방으로 가는 길은 멀고 위험했다. 일본군이 요동지방을 차지하고 있고, 러시아 연해주와 동시베리아에 안정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국제간섭군으로 출병해 있었다. 그리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뚫고 가야 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한 달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통합하기 위해 모인 연합대회. 국내외에서 150여 명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참석했다. 죽산은 개회식 날 이동휘를 만났다. 강화에서 보낸 유년시절, 백마를 타고 강화진위대를 지휘했던 이 전설 같은 인물은 옛날처럼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백발이 희끗희끗했다.
참석자 150여 명은 3분의 2가 상해파였다. 이동휘가 치밀하게 사전작업을 한 결과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동휘는 이르쿠츠크파를 깔아뭉개고 독선과 아집을 부렸다. 유년시절부터의 존경심은 청년 조봉암의 가슴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이르쿠츠크파에 기울었다. 회의는 결렬되고 두 파는 각각 자기들 주장을 합리화하는 보고서를 코민테른에 보냈다. 코민테른은 두 파의 대표들과 무소속 대표들을 모스크바로 출두하라고 통보했다. 그 가운데는 조봉암의 이름도 있었다.
모스크바 코민테른 본부에서 열린 연석회의에서 각 파 대표는 자기네 그룹만이 진정한 공산주의자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코민테른 대표 부하린은 결론을 내렸다.
"동무들은 내가 보기에 모두 똑같소. 무조건 합쳐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시오."
그리고 즉시 각파 조직을 해체하고 오르그 뷰로(공산당 조직총국)를 조직하라고 명령했다.
폐결핵으로 좌절된 대학 졸업의 꿈
죽산은 이때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그를 관찰했던 코민테른이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 특례입학생으로 지목한 것이었다. 대표들은 다 돌아가고 죽산 혼자 남아 공산대학에 들어갔다. 밤을 새워 공부하고 열심히 러시아어를 익혔다. 반년 만에 사상서를 읽고 토론회에 참석할 정도가 되었다. 워낙 출중해서 교수와 동급생들이 놀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으면 그는 대답했다. 이것이 내 조국을 되찾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오대학을 중퇴했던 그는 이번에는 교육과정 3년을 모두 마쳐 졸업장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다. 덜컥 폐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당시 결핵은 치료약이 없었다.
'조국 해방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여기 왔는데 죽어서 이국 땅 귀신이 되어 떠돌면 고깃값도 못하는 거지. 죽어도 내 나라로 돌아가서 싸우다 죽어야지.'
그는 이를 악물어 결심하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원규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