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갑자기 떠나자고 하더군요. 그 때가 1995년이었으니까 16년간 그와 함께 정처없이 다녔지요. 돌아보니 꿈만 같습니다.”
미국 보스턴의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제임스 화이티 벌저(82)의 연인 캐서린 그레이그(61)는 오랜 도피생활을 떠올리며 체념한 듯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1970~80년대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미국 뒷골목을 주름잡았던 벌저만큼이나 그레이그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스코틀랜드 남서부 항구도시인 글래스고에서 태어난 그레이그는 어렸을 적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해 거칠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스무 살, 같은 동네 친구였던 바비 맥고나걸과 결혼했다. 맥고나걸은 당대 벌저와 어깨를 겨누던 마피아 두목이었다. 73년 치위생사로 근무하던 그레이그는 우연히 벌저를 만난 후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는 맥고나걸과 이혼했다. 당시 벌저에게는 부인과 4명의 아이가 있었다.
벌저는 연방수사국(FBI)의 비밀정보원이자 마피아 두목으로 이중생활을 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그레이그와도 시간을 보냈다. 그레이그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벌저의 숨겨진 여인으로 살았던 그레이그는 94년 수사망을 피해 도망가자는 벌저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벌저의 부인 스탠리는 당시 FBI에 “벌저는 그레이그를 만난 뒤 그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며 “우리는 갈수록 멀어졌다”고 말했다. 벌저는 95년부터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그 후로 16년간 둘은 미 전역을 떠돌았다. 82년 보스턴 외곽에서 9만6,000달러짜리 아파트를 구입했고, 4년 후 인근에서 다시 16만달러짜리 저택을 샀다.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명을 쓰고, 모두 현금으로 계산했다.
둘은 거주지를 자주 바꿨지만, 주민들과는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다. 한 이웃은 그레이그가 애완용 푸들과 함께 산책을 했고, 멋지게 차려 입고 다녔다고 했다. 이들은 벌저와 그레이그가 평범하면서 다정한 부부로 보였다고 전했다. 그레이그는 미용실과 패션숍, 치과 등에도 자주 들락거렸다.
둘의 교묘한 변장술과 철저한 신분위조, 완벽한 은둔생활로 추적에 어려움을 겪던 FBI는 지난해 벌저보다 오히려 그레이그를 찾는데 주력했다. 그레이그가 성형중독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그의 신체적 특징을 적은 현상수배 전단지를 성형외과와 미용실 등에 집중 살포했다. 평일 낮 주부들이 즐겨보는 TV프로그램 등에도 그의 사진을 내보냈다.
FBI의 전략은 적중했다. 지난해 6월 그레이그는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아파트에서 지인의 제보로 벌저와 함께 붙잡혔다. 당시 둘은 각각 찰스와 캐롤 가스코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집 벽에는 80만달러의 거금이 숨겨져 있었다.
이달 초 푸른 죄수복으로 법정에 선 그레이그는 처음으로 범행을 시인하며 차분히 그간의 행적을 밝혔다. 하지만 연인인 벌저에 관해서는 증언을 거부했다.
보스턴 연방법원은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한 점을 감안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벌저의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들은 “16년간 벌저를 숨겨준 죗값을 치러야 한다”며 “그를 피해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분노했다. 뉴욕타임스는 “초췌한 그레이그의 눈빛에 허망함이 가득했다”고 묘사했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