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기설기 복잡하게 이어진 좁은 골목길 양쪽에 2층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건물 외피를 둘러싼 클럽(CLUB) 네온사인과 ‘내국인 출입금지’라는 푯말들이 낯설지 않다. 1970~80년대 미군 기지촌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바로 경기 동두천시 보산동이다.
21일 오후 미군 대상 상점들이 몰려 있는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는 인적이 거의 없어 적막감이 감돌았다. 간간이 오가는 미군 몇 명과 클럽 소속인 필리핀 여성들, 마지 못해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점 주인들의 시선만이 썰렁한 공간을 채웠다.
비단 이날만의 풍경은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군이 떠나며 한때 ‘개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는 동두천의 경기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처럼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동두천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K팝의 고향 같은 곳이란 사실은 아이러니다.
경기도가 최근 펴낸 ‘K팝의 고향 동두천’이란 책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 전국의 미8군 클럽 수는 264개에 달했고, 각 클럽마다 4,5개 팀의 전속가수와 밴드가 활동했다. 미군이 이들에게 지불한 보수는 우리나라의 연간 수출액과 맞먹는 120만 달러. 당연히 재능 있는 음악인들은 미8군 무대에 서기 위해 몰려들었다. 우리 대중음악의 원조격인 ‘록의 대부’ 신중현을 비롯해 윤항기, 현미, 장미화 등이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이곳 무대에 올랐다.
당시 서울 용산에는 미8군 사령부가, 동두천에는 주력부대인 보병2사단이 주둔했다. 미8군 무대가 서울 용산과 동두천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됐고, 스타로 우뚝 선 이들이 돈과 명예를 얻은 곳은 용산이었다. 검증된 음악인들의 무대가 용산이었다면, 동두천은 무명음악인들의 마이너무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중현이 1963년 국내 최초의 록그룹 애드포를 결성한 뒤 희대의 명곡 ‘미인’을 작업한 곳도 동두천이다. 방값이 저렴했고, 미8군 주력부대가 있는 만큼 일거리도 많았기 때문이다. 신중현 헬퍼(현 로드매니저)로 활동한 신현수씨는 “신중현의 기타연주를 듣기 위해 지방 주둔 미군들이 트럭을 타고 동두천으로 모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 추억의 그림자를 쫓아 요즘 한 창 뜨고 있는 K팝의 본류를 동두천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한 켠에서 일고 있다.
동두천은 시 전체 면적 95.68㎢ 중 40.63㎢가 미군 공여구역이었다. 면적 대비 공여구역 비율이 약 42%로 전국 지자체 중 최고다. 미군기지는 동두천에 기지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이는 주민들이 생활을 지탱해 온 필요악이었다. 그러다 미군이 떠나고, 이제 앞날이 막막해진 동두천이 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붙잡은 아이템이 K팝인 것이다. 정주연 동두천시 문화체육과 주무관은 “스토리텔링 작업은 도에서 맡았고, 우리는 보산동관광특구를 그에 맞춰 개발하기 위한 용역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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