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저녁 7시 30분 2호선 을지로입구역 명동성당 방향 출구.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에 이오른(33)씨가 나타났다. 그는 인근 가게에 맡겨 뒀던 '4ㆍ11 총선 투표 독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역 안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세로 1m 길이의 피켓을 들고 "투표합시다"라고 외치자 지하철로 바삐 움직이던 퇴근길 시민들이 힐끗 그를 쳐다봤다. 한 시민은 가던 길을 멈추고 피켓 내용을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이씨는 한 시간 반 동안 외로이 피켓을 들었다.
2009년 6월 27일 이 장소에서 첫 1인 시위를 시작한 이씨는 22일로 1,000일째를 맞는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씨가 실제 1인 시위를 한 건 450여 회. 첫 1인 시위 때는 '미디어법 반대'를 외쳤고, 그 다음엔 '6ㆍ2 지방선거 투표 독려'도 내세웠다. 이틀에 한 번 꼴로 거리에 나섰던 '1인 시위꾼' 이씨가 그간 피켓에 담았던 주제는 대략 20개. 투표 독려를 빼고는 대부분 저항정신의 발로였다.
"'한미 FTA 철회'피켓을 들었던 한 달 전쯤 40대 남성이 다가와 '한ㆍ미 FTA가 되면 나라에 이득인데 무슨 짓이냐'고 따지셨어요. 시위를 멈추고 30분 동안 이유를 설명 드렸어요. 그래도 계속 '매국노'라고 하시더라고요"
으레 그렇듯이 1인 시위 과정에서 이렇게 생각이 다른 시민들과 부딪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씨는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혹 의견이 다름에도 시위 자체를 존중해주는 시민을 만날 때 힘을 얻는다. 1년 전 을지로입구 역에서 '미디어법 반대'를 외쳤을 때 한 중년신사가 다가와 '난 당신과 의견이 다르다. 하지만 당신도 나라 생각하는 마음으로 시위를 하는 걸 테니 당신을 존중한다'는 말로 격려해줬다고 한다. 그는 "진보든 보수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때 느꼈다. 그게 성숙한 민주주의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대학 다닐 때 시위 한 번 나선 적이 없다는 그는 왜 1인 시위꾼이 된 것일까. "2008년 서울 광화문 촛불 시위에 나갔을 땝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됐어요. 합법적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1인 시위를 시작하게 됐죠."
1인 시위 1,000일째를 맞은 이씨는 1년 동안 '투표가 희망을 만든다'는 주제로 4ㆍ11 총선 투표 장려 시위를 해온 결실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수단"이라며 "진보, 보수를 떠나 국민이 투표를 안 한다면 잘못된 정치인을 욕할 권리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 국민이 투표에 동참한다면 정치인들은 전 국민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예요. 모두가 투표에 참여해야 세상이 변하는 거죠."
이씨는 투표 독려 1인 시위를 대선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게임 회사 시나리오 작가인 그는 "직장 다니랴 1인 시위하랴 정말 힘들었다"며 "계속은 못하더라도 선거가 있을 때마다 투표 독려 피켓을 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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