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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톡! 톡! 꽃망울 터뜨리는 매화 기어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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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톡! 톡! 꽃망울 터뜨리는 매화 기어이, 봄

입력
2012.03.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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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에 닿는 공기 입자의 감촉 말고 망막에 맺히는 빛의 알갱이를 믿기로 하자. 거뭇한 나뭇가지 끝에 젖먹이가 뱉어 놓은 기침 같은 뽀얀 색의 뭉치. 태양의 인력에 끌리듯 하늘을 향해 벌어진 작고 여린 피륙은 노란 심지가 박힌 우윳빛, 또는 청초한 연두를 품은 백자색이거나 먼 남국의 노을빛이다. 매화(梅花). 반도의 아랫자락, 탐진강과 섬진강과 남강이 바다에 다다르는 마을마다 매화가 피기 시작했다. 새벽바람의 온도가 어떠하든, 흙의 단단함이 아직 어떠하든 이제 계절이 바뀐 것이다. 기어이, 봄이다.

옛사람들은 매화를 완상하는 일에 이치를 궁구한다는 뜻을 지닌 심(尋)자와 탐(探)자를 붙였다. 심매 혹은 탐매. 풍류에 붙이는 이름치곤 격조가 높다. 유교의 예악(禮樂)을 숭상한 사람들이 매화를 아끼는 태도는 유달랐는데, 북송 시대 문인인 범성대의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매화는 천하의 우물(尤物ㆍ첫째 가는 물건)이니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 간에 누구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시인 묵객이 시를 지어 찬미하는 노래를 짓고 왕공대인이 뜰에다 심었다. 심지어 할 일 없는 사람이나 숨어 사는 선비, 산속의 승려의 무리까지 또한 화분에 매화를 담아놓고 기른다.”

선인들의 탐매행을 흉내내려는 게 아니라 남도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빛의 봄마중 소식을 전하려는 참. 그런데 길 나서기 전 뒤적거린 몇 권의 책엔 찬매(贊梅)의 말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건 하나같이 젊어서 탱탱한 나무보다 기울어지고 수척하더라도 오래된 나무의 매화를 높게 치고 있다는 점. 늙어 비틀어져 꺼칫꺼칫한 가지에 터져 나오는 꽃잎에서 옛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고매(古梅)를 찾아 동선을 짰다. 수령 100년을 헤아리는 매화나무들은 대부분 전남과 경남에 퍼져 있다. 연평균 기온을 기준 삼아 섭씨 12도 이상을 이어서 그은 곡선이 고매의 분포 곡선이 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에 도착하니 급하게 도착한 봄볕이 짱짱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들어야 할 날씨다. 땅끝 방향으로 달려 해남 녹우당으로 갔다.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집이다. 고산의 후손이 살고 있는 살림집이기도 한 녹우당의 앞마당과 사랑채 뒤편, 집을 둘러싼 덕음산은 3월 초면 진분홍색과 백색으로 겹꽃의 매화가 흐드러진다. 올해는 개화가 늦다. 3월 중순인데도 매화는 강냉이알 같은 몽우리로 맺혀 있었다. 지난 겨울 궂은 날이 잦았던 탓인 듯. 밖으로 드러난 고매 가지의 검은빛과 아직 몽우리에 갇혀 있는 꽃의 흰빛이 어우러진 긴장된 대비가 터질 듯 팽팽했다.

완도 방향으로 난 길을 버리고 강진 쪽으로 길을 잡았다. 짚이는 게 있었다. 지도를 펴고 보면 완도가 아랫녘 가운데서도 가장 남쪽. 그러나 기상청이 내놓는 봄꽃의 개화 곡선은 동쪽 통영 부근이 더 봉긋해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이 났다. 강진과 장흥을 지날 때도 길가의 매화나무 가지는 아직 몸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보성 초입, 드디어 매화를 보았다. 득량만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회천면의 평범한 농가. 아름드리 팽나무 군락이 장관인 마을 여염집에 백매를 피운 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주민에게 들은 수령은 100살 가량. 터지기 시작한 꽃들이 막 우화(羽化)를 끝낸 곤충의 날개처럼 보였다. 촉촉해 아직 향기가 깊지 않았다. 흰빛이 투명할 만치 청아했다.

매화는 꽃잎의 색깔에 따라 백매와 홍매로 나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백매의 흰 빛깔도 유백색, 순백색, 푸른 빛이 도는 백색, 연분홍 빛이 겹친 백색, 안쪽은 희고 바깥쪽은 분홍인 색, 피기 시작할 때는 붉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얗게 변하는 색 등 다양하다. 홍매도 여러 빛깔이긴 마찬가지. 옛 선비들은 그 빛을 백(白), 녹(錄), 묵(墨), 홍(紅) 넷으로 나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홍매보다 백매가 좋고 만첩(겹꽃)보다는 단첩(홑꽃)이 더 고상한 것”이라고 했다. 유자(儒者)들의 까탈스러운 심미안에 따르면 꽃받침이 녹색이고 꽃잎이 백색으로 다섯 장이고 꽃잎이 벌어지지 않은 홑꽃 녹악매(錄萼梅)와 검붉은 빛깔의 묵매가 그 중 귀하다.

회천 땅을 벗어나 벌교, 승주, 광양으로 갈수록 개화한 매화나무를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해남 땅에서 만난 매화농장 주인은 “광양 어름엔 필경 꽃이 피었을 것”이라 했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축제 준비로 분주한 다압면 매화마을보다 섬진강 따라 이어진 시골길이 오래 발을 붙잡았다. 농기계와 비료 포대 사이, 수매창고를 여백 삼아 무뚝뚝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하얀 색 봄의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남도 매화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삼은 곳으로 향했다. 수백 년 묵은 고매들이 모여 사는 곳. 낙안읍성과 엄동설한에 꽃을 틔우는 납월매로 유명한 금둔사를 거쳐, 순천 승주읍 선암사에 도착했다.

광양에서 차를 돌릴 때부터 끄무레하던 하늘은 선암사에 도착하자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꽃망울은 아직 皐痴?않았다. 620살 먹었다는 백매와 550살 먹었다는 홍매가 봄비가 몰고 온 안개에 싸여 있었다. 아쉬움은 없었다. 한없이 은은한 기운이, 비록 기온은 찼으나 천지간에 가득했다. 터지기 직전의 꽃망울에 맺힌 빗물 방울이 얼마나 영롱한 것인지를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거무죽죽한 빛으로 구불구불 뒤틀리고 껍질이 트고 더러는 꽃망울 대신 이끼를 매달고 있는 나뭇가지들, 그 늙음에 핀 여린 꽃에서 청고함을 보았던 선비들의 경계는 여전히 멀었다. ‘귀로불귀눈(貴老不貴嫩ㆍ늙은 것은 귀하고 어린 것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을 이해하기엔 살아온 시간이 아직 짧은 탓이다.

광양ㆍ순천ㆍ해남=글ㆍ사진

도움말 토종식물 연구가 안완식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고매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남도의 문화재들이다. 순천 선암사(061-754-5247)와 송광사(061-755-0107), 구례 화엄사(061-782-0011), 장성 백양사(061-392-7502)가 오래된 매화나무로 유명하다.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면앙정, 명옥헌 원림 등 담양의 정자와 고옥들도 탐매 여행에 좋은 장소다. 담양군 관광레저과 (061)380-3152. ●30여년 매화를 연구해온 안완식 전 한국토종연구회 회장의 (눌와)은 탐매 여행에 안성맞춤인 가이드북이다. 매화에 대한 상식과 함께 전국 250여 곳에 있는 고매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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