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인가, <오지게 사는 촌놈> 이라는 책을 만났다. 전남 광양에 사는 농부 서재환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라도 사투리로 쓴 생활 수필집이다. 희한했다. 100% 사투리 버전의 책이라니. 게다가 참 맛있었다. 뭔 소린고 한참 헤매야 했지만 씹을수록 진국인 것이, 무엇보다 사람 사는 냄새 팍팍 나는 글맛에 쏙 빠져 나중에는 입안에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오지게>
이 별스런 책은 월간지 <전라도닷컴> 이 냈다. 거기에 연재한 것을 묶었단다. <전라도닷컴> 을 그렇게 해서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나오는 월간지이고, 전라도말로 전라도 사람과 자연과 문화를 담는 그릇이고, 잡지의 전설로 남은 예전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이 생각나는 잡지임을. 샘이깊은물> 뿌리깊은나무> 전라도닷컴> 전라도닷컴>
요즘도 이런 잡지가 있나 싶다. 그 흔한 연예인 사진 한 장 없고, 잘난 사람 이야기는 그림자도 안 비치고, 광고도 거의 없다. 등장 인물이라곤 시골 어디든 가면 쉽사리 만날 법한 이웃들이다. 마을 고샅길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할아버지, 장터에 보따리 풀어 곡식과 채소 몇 줌 놓고 파는 할머니, 논밭에서 허리 펼 새 없이 일하다가 풀꽃 하나 만나면 "오매, 이쁜 거"하고 눈을 맞추는 양반들…. 그들이 이 잡지의 주인공이다. 요란할 것 하나 없는데, 볼수록 정이 가는 것이 전라도말로 '귄있다'는 표현이 꼭 맞겠다.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주니 더 힘이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것, 전봇대에 희망이라는 간판을 단 고물상 주인 이야기. "희망이 그리운게 희망이라고 썼겄제. 희망이 없는 것 같애서 갖고 싶어서 썼겄제. 희망을 놓고 가면 폭폭한게 썼겄제."
많이 배운 이들의 말처럼 폼 나진 않아도 귀하고 따스운 말씀과 사연이 수두룩하다.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 건진 것들이다.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나눠 피고 장터에서 함께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말문을 트기까지 오래 기다려서.
미련하게 한 길을 걸어온 전라도닷컴이 이달로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2000년 온라인 사이트로 출발해 2002년 월간지로 나온 지 10년, 전라도 바깥에서도 사랑받는 잡지가 되었다. 2008년 지역잡지로는 유일하게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잡지로 꼽혔고, 2009년 문화부와 한국잡지협회로부터 우수 콘텐츠 잡지로 선정됐다.
그러나 형편은 어렵다. 창간 때부터 후원해준 광주의 향토기업 빅마트가 경영난으로 지원을 중단함에 따라 2007년 11월 허허벌판에 섰다. 결국 그해 12월호는 내지 못했다. 존폐 기로에 서자 독자들이 나섰다.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모으고 독자 늘리기를 자청해서 살려냈지만, 지금도 겨우 꾸려간다.
10주년 기념호인 3월호 기획특집은 '독자'다. 전국 각지의 고마운 독자들 이야기다. 농약 치지 않고 키운 밀과 직접 만든 과일잼을 틈 나는 대로 보내 주는 농부네 가족, 10년 정기구독 만료를 앞두고 2023년까지 다시 10년 연장을 신청한 독자, 어려운 살림에 팔아서 보태 쓰라고 한땀한땀 수놓아 바느질한 찻잔받침을 보내 주는 이, 나락 판 돈을 덜어 <전라도닷컴> 후원 전용 통장을 만든 농부…. 올해 아흔한 살인 최고령 독자는 매년 정성껏 손으로 쓴 격려의 글을 담아 연하장을 보내온다. 하나같이 도타운 인정이고 우정이다. 전라도닷컴>
<전라도닷컴> 은 광주의 대인시장 안에 있다. 상인들도 벗이고 후원자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기름, 몸뻬바지, 꽃버선 같은 물건들로 정을 보태 준다. 2009년 연말 서울 대학로의 빈대떡집에서 열린 서울 독자의 밤 행사에서 벌어진 즉석 패션쇼의 히트작 몸뻬바지도 대인시장표였다. 전라도말 퀴즈에서 우승한 독자가 그걸 입고 한 바퀴를 돌았고 장내는 웃음바다가 됐다. 전라도닷컴>
<전라도닷컴> 은 전라도만의 것이 아니다. 경상도닷컴 강원도닷컴 충청도닷컴 제주도닷컴이 줄줄이 나오는 것이 이 잡지의 소원이란다. 그리하여 사는 곳은 달라도 저마다 소중하고 차별 없이 어울려 살 맛 나는 세상을 꿈꾼다. 전라도닷컴이 사랑받는 이유, 사랑받아야할 이유다. 전라도닷컴>
오미환 문화부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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