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에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불안한 사람들은 역시 인근주민이다. 한달 여 동안이나 감쪽같이 은폐됐던 고리원전 1호기 정전사고가 세상에 드러난 지 이틀 뒤인 지난 15일, 이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고리원전민간환경감시기구'가 발전소를 찾아 갔다.
다짜고짜 쳐들어간 건 아니었다. 전날 고리원전 측에 방문사실을 공문으로 정식 요청했고 허락까지 받은 상태였다. 어차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현장조사가 진행 중인 터라 정확한 사고경위나 설명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불안에 떨고 있는 지역주민들이 걱정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도록 성의 있는 답변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고리원전 최고책임자인 이영일 본부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1발전소장만 나타나 "죄송하다. 하지만 당시 전력수급에는 이상이 없었다"는 궁색한 답변만 늘어 놓았다.
주민들이 화가 난건 당연했다. 주민들은 "지역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중대 사안이고 시간 약속까지 했는데 왜 본부장은 보이지 않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당시 현장에 동행했던 최선수(48) 감시기구 센터장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아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며 "더 이상 원전의 안전성은 물론 이를 운영하는 고리원전, 한수원 등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몰랐던 원전사고가 얼마나 더 많겠냐"고 성토했다. 화가 난 지역주민들은 15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로부터 3시간 여 뒤인 오후 2시. 주민들이 방문했을 땐 "원자력안전위원회 현장조사 때문"이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 본부장은 김정훈 의원(새누리당) 등 국회의원 등이 오자 직접 브리핑에 나섰다. 질문에는 상세하게 답하고, 현장까지 보여주면서 무려 2시간이나 동행했다.
지역주민들만큼 이 사고가 궁금하고 걱정스런 사람들은 없다. 고리원전 측이 정말로 사고를 무겁게 생각하고, 은폐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면 지역주민들한테 이런 식으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정이 무엇이든, 기꺼이 고개 숙이고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할 원전 책임자가 찾아온 주민들은 외면하고 국회의원 의전만 신경 쓴다는 건 또 한번 비판 받을 일이다. 하기야 국민을 존중할 줄 모르는 곳이니, 이런 은폐를 생각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산업부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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