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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2주기/ (上) "해마다 3월이면 눈물바람" 유족들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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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2주기/ (上) "해마다 3월이면 눈물바람" 유족들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입력
2012.03.1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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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었으면 오늘이 정훈이가 제대한 지 1년이 되는 날인데…."

17일 대전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 천안함 희생자 고 박정훈 병장의 어머니 이연화씨는 아들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박 병장의 아버지 박대석씨는 "해마다 3월이면 눈물 바람이다"며 "나도 눈물이 솟을 때면 회사에서 집까지 한 시간 반을 무작정 걷는다"고 말했다.

2년 전 천안함 침몰 뒤부터 모든 게 변했다. 어머니 이 씨는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돌아서면 기억을 잊곤 한다. 길 가는 젊은이들만 봐도 눈물이 나고, 아들 얘기가 나올까 친척도 친구도 만나지 않는다. 아버지 박 씨는 더 이상 산에 오르지 않는다. 함께 오르던 아들 얼굴이 어른거려서다. 소주라도 한 잔 하면 자연스럽게 나왔던 군대 얘기도 더는 않는다. 박 씨는 "천안함이 가라앉은 바다가 내가 해군에 있을 때 출동했던 그 바다다. 정훈이 앞에서도 해군 자랑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며 "아들이 부대에서 별명이 웃음 전도사였다던데, 나는 기껏해야 공부하란 소리밖에 하지 못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도 지난 2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성원 덕분이었다. 박씨는"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슬퍼해주고 위로해 주는데 놀랐다"며 "유가족들도 국민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줄 방법을 찾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이 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고 조정규 중사의 어머니 김태선씨는 "세월이 가면 익숙해지게 마련이라지만 부모 맘이 그렇겠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 손수민 중사의 어머니 전미경 씨는 "수민이 아버지는 출퇴근 때마다 아이 방을 들여다 보고, 여동생도 오빠 사진을 보며 혼자 훌쩍인다"며 "수민이가 하던 아동 후원을 늘려 6명의 아들ㆍ딸이 생겼지만 아들의 빈자리는 여전히 크다"고 털어놨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산화자 가족의 아픔은 더 하다.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에서 살아남았다가 끝내 산화한 고 박경수 상사의 어머니 이기옥씨는 "낼모레면 온다던 애가, 사고 난 날 저녁에도 전화해 걱정 말라던 아들이…"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씨는 "할머니와 엄마를 먼저 챙기는 9살 손녀를 볼 때면 가슴이 무너진다. 아빠 없는 게 알려질까 봐 친구들도 데려오지 않는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가족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만큼이나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염려가 크다. 고 나영민 상병의 부친 나재봉씨는 "16일 경기 평택의 해군 제2함대를 찾았다"며 "천안함 생존자들이 하나 둘 제대하면서 남은 장병들의 부담이 더 커지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유가족들은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이제 새로운 가족이 되고 있다. 고 임재엽 중사의 어머니 강금옥씨는 "아이들 생일날이면 가까이 있는 유족들이 서로 모여 축하해준다"며 "아이들이 새로운 가족의 인연을 맺어주고 갔다"고 말했다. 묘역에 놓인 조화를 봄 꽃으로 갈기 위해 이날 대전현충원을 찾은 고 이상준 중사의 어머니 김이영씨는 "하나같이 내 아들 같은데, 자식의 운명을 대신하지 못해 죄스럽기만 한 게 엄마들 마음"이라며 비석 46기를 정성스레 닦았다.

하지만 천안함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이들에게 또 다른 아픔이다. 고 심영빈 중사의 아버지 심대일씨는 "선거철이 되니 여ㆍ야 할 것 없이 천안함을 들먹이는 통에 애 엄마는 밤잠도 못 이룬다"며 "표를 얻기 위한 말들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ㆍ사진=이동현기자 nani@hk.co.kr

■ "먼저 산화한 동료들 꿈에 나타나…" 생존장병들도 고통

천안함에 승선했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아직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안함 생존자는 총 58명. 이 중 42명은 현역복무중이며 16명은 전역했다. 현역으로는 18명이 함정에, 24명은 육상부대에 근무중이다.

천안함 생존장병으로 해군 2함대 항만지원대에 근무하고 있는 공창표 하사는 "먼저 산화한 동료들이 몇 달 간격으로 꿈에 나타난다. 그때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2함대에 남았다"며 "차가운 백령도 바다에 수장된 전우들의 복수를 위해 2년간 뼈를 깎으며 칼을 갈고 있다"고 말했다.

사병으로 제대한 생존장병들은 지난 2년간 천안함재단 등에서 지원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등 후유증 극복에 안간힘을 써왔다. 이들은 때때로 모임을 갖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천안함재단 관계자는 "지난 2년 동안 많은 생존장병들이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달에는 만남을 주선해 9명 정도가 서울역 근처에서 만났지만 만났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며 "치료는 끝냈지만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한편 천안함 침몰 이후 전투준비 태만 및 지휘 감독 등의 책임으로 징계유예처분을 받기도 했던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은 지난해말부터 진해 해군 교육사령부 교리발전부 처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부함장이었던 김덕원 소령은 해군대학 학생장교 과정을 밟은 뒤 현재 수송함인 독도함의 전투정보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2년간 정부와 피말린 싸움, 선원들 의사자 지정 눈앞"

"금양98호 선원들이 의사자로 지정받지 못한다면, 타인의 어려움을 보고 과연 누가 손을 내밀겠습니까?"

2010년 천안함 침몰 직후 실종자 수색 작업을 마치고 철수하다 사고로 침몰한 금양98호 선원의 유가족들이 2년 만에 한을 풀게 됐다. 법적 제한으로 미뤄져 온 의사자 지정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16일 부산 자택에서 만난 이원상(45) 실종자가족대책위원장은 "고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생업도 포기한 채 정부와 싸움을 벌여 온 피말리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 대기업 중장비 설치 현장소장으로 일하던 중 당시 금양98호 항해사였던 형 용상씨가 사고로 실종되자 직장을 포기한 채 선원 가족 대표로 일해왔다. 이씨는 "형은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중학교만 졸업한 뒤 온갖 궂은 일을 하느라 결혼도 못한 채 작고했다"며 "생전 자상하고 묵묵하게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던 그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해 기필코 고인의 명예를 지켜주리라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자 지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족들은 "국가의 요청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다가 변을 당한 만큼 금양98호 선원들을 의사자로 지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2010년 복지부 의사상자심사위원회는 금양98호 선원 9명(사망 2명·실종 7명)에 대해 의사자 불인정 결론을 내렸다. 수색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다른 화물선과 충돌해 침몰한 금양98호 사고는 의사상자 규정인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구조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씨는 "애통하던 유족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낸 건 오로지 법리만 앞세우던 일부 공무원들의 차가운 태도였다"며 "힘들 때에는 의사자 지정만 이루고 나면 바로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후 국회에서도 의사상자 규정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비판이 일면서 관련 법률과 시행령이 차례로 개정됐다. 결국 개정된 시행령이 지난달 공포됐다. 금양98호 선원들에 대한 의사자 인정 재심사는 29일 열릴 예정이다.

부산=강성명기자 smkang@hk.co.kr

■ "이제라도 바로잡혀 다행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바로잡혀 다행입니다."

의사자 관련 법 개정으로 금양98호 선원들이 의사자로 지정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유족만큼 뜨거운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다. 개정 운동에 앞장 선 김순환(48ㆍ사진)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자문위원이다.

16일 서울 양천구 목동 미래희망연대 양천구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김 위원은 "법 개정이 금양호 선원들을 위한 것이었다"며 29일 복지부 심의에서 무난히 의사자 지정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정당활동을 하는 김 위원이 여기에 뛰어든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배를 탔던 순진한 사람들이 정부가 가라고 해서 갔다 희생됐다"며 "여론이 잠깐 반짝하다 가라앉을 것 같아 바로 인천으로 달려 갔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자비를 들여 양천구에 금양98호 희생자 분향소를 마련했고, 이후 1주일에 2번 이상 국회의원들을 찾아 다니며 법 개정을 건의했다. 그는 "여야 정치권이 군말 없이 법 개정에 합의하자 정부는 못 이기는 척 들어줬다"며 "이렇게 술술 풀린 게 신기할 정도"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금양호 유족들은 천안함 유족들의 동의로 국민 성금의 일부를 받았다"며 "천안함 유족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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