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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 8년 만에 새 장편 '유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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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 8년 만에 새 장편 '유랑자'

입력
2012.03.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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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등단 30년을 맞는 소설가 정찬(59)씨가 일곱 번째 장편소설 <유랑자> (문학동네 발행)를 펴냈다. "그간 단편 작업에 매진하느라" 장편으로는 <빌라도의 예수> (2004) 이후 8년 만이다. 정씨는 이번에 환생이라는 초월적ㆍ형이상학적 소재를 요리해 기원후 2000년 역사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무속신앙을 가로지르는 근사한 이야기를 선보인다.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인 전쟁 전문 기자 케이는 이라크전쟁 취재 중 만난 아랍인 청년 이브라힘으로부터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듣는다. 미군의 공습으로 치명적 부상을 입고도 스스로를 "죽지 않는 존재"라고 칭하는 이브라힘은 1000년 전 십자군전쟁 때 전생의 케이와 만났노라 말한다. 십자군 종군 사제(케이)와 적군 포로인 이집트 총독의 기록관(이브라힘)으로. 나아가 자신이 예수의 제자이자 반려자였다며 또다시 1000년을 거슬러 전생을 증언한다.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랑과 사회 의식이 충만했던 한 인간이었다는 기록관의 증언은 사제에게 신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충격이다. 사제는 기록관과 함께 예수의 행적을 좇으면서 둘 중 누구의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 하여 누가 죽어 마땅한 '마귀'인지 가리고자 한다.

주인공 케이의 현재는 이야기의 또 다른 축.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슬픔의 길'을 순례하던 케이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케이가 어릴 적 가족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무녀로 살았던 친모의 존재를, 그는 이태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듣고 처음 알았다. 그는 어머니의 신딸 강희와 함께 어머니의 장례와 넋굿을 치르면서, 이브라힘을 만날 당시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환생에 대한 믿음이 무속 신앙에도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가 이 보이지 않는 섭리에 점점 마음을 열면서 오래 앓아온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간다.

서사 측면에서 이번 소설의 매력은 예수의 생애, 십자군전쟁, 이라크전쟁 등 1000년씩 떨어진 역사적 사건을 환생(전생)을 매개로 나란히 포개는 남다른 상상력. 특히 '한 남자'라는 시각에서 재해석되는 예수의 생애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다. 종교적 신성(神性) 대신 역사적ㆍ인간적 관점에서 예수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소설 작업이 드물지는 않지만, 혁명 세력과의 연계설, 결혼설 등 예수에 관한 다종한 가설들을 하나의 서사로 절묘하게 엮어내는 솜씨는 흔한 것이 아니다. 여기엔 무속적 상상력도 개입하는데, 예컨대 예수의 부활을 초혼(招魂)의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랑자> 가 종군 기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전쟁의 부조리와 참혹한 죽음을 똑똑히 목격하는 자다. 또한 명확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직업 윤리를 지녔다. 그런 점에서 케이는 세계의 폭력성을 절감하면서도 현실 논리에 갇혀 해결 방안을 상상하지 못하는 오늘날 인류의 표상이다. 군데군데 철학ㆍ신학에 관한 고급스런 에세이처럼 읽히는 이 소설에서 정씨는 현대 문명을 이렇게 진단한다. "시간이 분절된다는 것은 삶이 분절된다는 것을 뜻한다." "분절은 망각을 끌어들인다. 내가 나를 잊고, 네가 나를 잊는다." "분절과 망각의 파국적 형태가 죽임이다. 내가 나를 죽이고, 네가 나를 죽인다. (중략) 죽임의 총체적 형태가 전쟁이다."(336~7쪽)

환생은 이런 난국에 작가가 던지는 존재론적 메시지로 읽힌다. 삶과 죽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회귀하는 유랑 같은 것이라 고쳐 생각한다면, 내 생애는 내가 기억 못하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영위되는 것이라 여긴다면 스스로를, 세계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안. 정씨는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는 환생의 사유가 있다면 세계를 황폐화하는 바닥 없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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