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가 끝났을 때 나는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숨을 헐떡이며 나와야 했다. 영화 자체의 힘과 박력이 대단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매일매일 맞부딪치면서 또 애써 외면하는 자본주의의 맨 얼굴 한 바닥을 두 시간 내내 1cm 앞에서 마주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온 세상으로부터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완벽하게 버림받는 소름 끼치는 고독감의 악몽이다.
이 '고독감'은 허무니 실존이니 하는 고상한 정서를 말하는 게 아니다. 현금 관계라는 포위망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 턱밑으로 조여 드는 폭력의 위협 속에서 인간 관계와 삶과 육신과 마침내 자기의 정체성까지 차근차근 파괴되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아주 쌍스럽고 욕지기 나는 고독감을 말한다. 화폐와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오래된 주제이지만, 마르크스나 짐멜과 같은 고전 이론에서는 화폐가 어떻게 하여 파편화된 개개인들을 엮어주어(비록 물상화된 형태로나마)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게 되는가의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그 반대 측면, 즉 자본주의에서 화폐로 표시된 채권 채무의 연결 고리가 어떻게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여 인간을 개개인의 알갱이 원자로 갈아버리는가, 그리고 종국에는 그 개인이라는 알갱이마저도 채권 채무와 관련된 몇 줄의 사실 관계만 남겨놓고서 마침내 가루로 으깨어 공중으로 날려버리는지는 별로 이론화되거나 다루어진 바가 없다.
칼라일의 표현대로 자본주의에 들어서서 인간 세상의 중심에는 이 '현금 관계'가 들어앉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인간에게 삶을 살아갈 보람과 희망을 제공하는 모태이지만, 날이 갈수록 뚱뚱해지는 이 현금 관계의 확장 앞에서 힘없이 여위어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절대적 임무와 역할은 돈을 구해와서 또 돈을 쓰고 메우는 것임을 깨닫게 되며, 거기에 한 치의 오차라도 있었다가는 자신의 존재가 정확히 그 오차만큼 그 즉시 소멸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 형언할 수 없는 고독감, 제대로 벌어 제대로 쓰고 갚는 데에 실패한다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고독감이 그를 덮친다. 이 현금 관계 안에서의 고독감을 덜어줄 수 있는 인간 관계란 없다. 전화기 건너편으로 그토록 그립던 이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김민희는 그저 흐느낄 뿐 말을 걸 수가 없다. 그녀를 부둥켜 안은 이선균의 황소같이 선한 눈망울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두 이미 늦어버렸다. 돌이킬 길은 없어졌다.
굳이 이렇게 구구절절이 말로 해놓고 보니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 그 긴장을 견디고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는 너무나 진부하고 익숙한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그 구질구질함이라도 좀 면해보려고 이러한 '현금 결합체'를 온갖 말로 미화하고 쿨한 것으로 채색해 왔다. 케이블 TV를 점령해버린 대부업 광고는 축제처럼 밝고 경쾌하기 그지없고, '부채도 자산'이라는 헛소리는 무슨 재테크 '과학'의 최신 발견이나 되는 양 온 사회를 횡행해왔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온 세계가 가계 기업 정부 할 것 없이 모조리 빚더미에 올라앉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청산의 그날'이 임박하였다. 전 세계의 민간과 공공 부문 모두가 축적한 채무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 채무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는 '디레버리지' 과정이 세계 자본주의의 앞길에 버티고 있다. 이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기실 힘있는 이들이 온갖 방법으로 빚을 털어내거나 떠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폭력적인 조치들이 행해질 것이고, 그 결과 파산한 이들의 곡 소리는 하늘을 가득 메울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애써 외면해왔던 이 끔찍한 고독감이라는 자본주의의 민 낯을 실로 두렵게 눈앞에 한 가득 마주치게 될 것이다. 영화 '화차'가 개봉 1주일 만에 관객 1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모두 이미 그날이 닥쳐올 것을 예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극장 앞의 인파는 그날을 앞두고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예행 연습의 행렬일지도 모른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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