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부품 제조업체 W사는 이달 초 시중은행 대출금 15억3,000만원의 만기를 맞았다. 은행 측은 기술보증기금에서 보증서를 연장하는 조건으로 대출금 규모를 20% 줄이겠다고 통보했다. 가뜩이나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당장 3억원 넘는 돈을 상환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W사는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간신히 다른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중소기업들의 자금 조달 통로가 꽉 막혔다. 신용도가 낮아 회사채ㆍ주식 발행 등 직접금융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나마 기대고 있던 은행들도 문턱을 점차 높여나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한계 중소기업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18일 금융감독원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중소기업이 조달한 자금은 총 443조6,000억원. 이 중 은행 등 금융권 대출이 99.4%(441조1,000억원)로 압도적이었고, 회사채ㆍ주식 발행 등 직접금융 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은 0.6%(2조5,000억원)에 그쳤다. 대기업의 직접금융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 비중이 38.5%에 달하는 것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중소기업의 직접금융 자금 조달 비중은 2009년 1.2%에서 2010년 0.9%, 그리고 작년에는 0.6%로 낮아지는 등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NICE신용평가 관계자는 "신용도가 떨어지는 중소기업들이 증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 자체가 워낙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아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올 들어서는 그나마 미세하게 열려있던 직접금융 통로마저 완전 차단됐다. 올해 1월 중소기업들이 직접금융을 통해 조달한 자금 규모는 694억원. 작년 같은 달(4,014억원)의 20%에도 못 미친다. 2개 중소기업이 12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했지만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및 전환사채(CB) 등 주식 관련 사채였고, 일반 회사채 발행은 전무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월에도 중소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197억원어치에 불과했고, 역시 일반 회사채 발행은 거의 없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기업에 비해 부도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소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은행 대출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 대출도 만만치 않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기업의 은행 대출은 최근 4년 동안 3배 넘게 늘어난 반면, 중소기업 대출은 2007년 355조3,000억원에서 지난해 441조1,000억원으로 24% 증가하는데 그쳤다. 전체 대출금액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도 2007년 90.9%에서 지난해 79.3%까지 급락했다. 모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중기 대출을 독려하는 정부 시책에 따라 중기 대출을 무작정 회수하긴 어렵지만, 경기 둔화에 따른 부실 확대 가능성을 고려하면 대출 증가폭을 줄일 수밖에 없다"며 "우량 중기와 비우량 중기 간에 자금 조달 양극화 현상도 점점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당국은 중소기업 전용 주식 및 채권시장을 신설하고 연대보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중기 자금경색 해소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기대하는 만큼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자본시장연구원 김란영 선임연구원은 "중소기업의 원활한 자금 조달을 구조적으로 정착시키려면 은행 대출에만 의존하는 현재의 관행에서 벗어나 자본시장 측면에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며 "금융당국이 현재 내놓고 있는 대책들이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인지 잘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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