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카 평전/조너선 해슬럼 지음·박원용 옮김/삼천리 발행·640쪽·3만5,000원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 를 쓴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ㆍ사진)는 실은 한 번도 대학 역사학과에서 정식 교수로 근무한 적이 없었다. 강사로 옥스퍼드대에 임명된 적은 있지만 냉전 분위기와 보수적인 학교 풍토 속에서 찬밥 신세였다. 회갑을 넘겨 모교 케임브리지대의 연구교수가 됐으나 거물 역사학 교수들을 비판하고 교육 개혁을 외치며 마찰만 빚었다. 역사란>
젊은 시절 임시직 외무 공무원으로 라트비아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러시아 문학에 심취한 그는 1919년 러시아혁명에 큰 충격을 받는다. "살아오면서 결코 상실한 적이 없는 역사의식을 제공"한 러시아 혁명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소비에트 연구에 남은 전 생애를 바쳤다. 그래서 내놓은 저작이 냉전의 한복판에서 쌓아 올린 소비에트 연구의 금자탑이라는 14권짜리 <소비에트 러시아사> 다. 소비에트>
이런 그를 전후 냉전 분위기 일색이던 영국의 대학과 사회가 후대했을 리 만무하다. "동서 냉전을 배경으로 형성된 서구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반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는 스탈린주의자 취급까지도 받았다.
말년의 카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해슬럼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카가 써낸 저작과 논문, 수많은 논설과 논평, 비망록과 육필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일대기를 재구성했다. 저자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자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 인간이라기보다는 반신(또는 악마) 같은 존재였다"고 평가하면서도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그러한 용기와 단호함으로 발언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군뿐 아니라 수많은 적군을 만들기가 쉬었다"고 옹호한다. 책에는 외교관, 언론인, 정치학자, 역사가로서 카의 다양한 모습뿐 아니라 아놀드 토인비, 이사야 벌린 등 당대의 지성들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벌인 치열한 지적 논쟁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세 번이나 결혼했지만 결국 불행한 생활을 극복하지 못한 카는 사회성이 부족했고 이기적이었고 결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인간미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족들과도 마음을 터놓지 못했다. 책은 이 같은 카의 사적인 부분에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 옮긴이처럼 학문적인 작업과 성과에 더 비중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사를 부각한 이 같은 작업 때문에 책은 전기로서 더 온전한 모습을 갖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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