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지인 몇 분이 또 세상을 떠났다. 활짝 피어날 개나리와 벚꽃을 그리워하면서 어제 또 한 분이 봄의 풍광보다 더 그리워하던 하늘나라로 떠났다. 빈소를 찾을 때 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정말 돌아가신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대체 죽음은 왜 우리를 산자와 갈라놓는 것일까. 장례 때마다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 죽음은 또 다시 저만치 떨어진 작은 장처럼 시야를 떠난다.
나는 정작 가족들조차 임종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마지막 시간조차 다른 일들로 분주하다 임종을 놓친 것이다. 시신 앞에 고개를 숙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작별을 고했다. "곧 뵐게요."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이제 네 차례가 다가오고 있어."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일깨운다. 아!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이 땅에 머무르는 시간이 정말로 길지 않구나! 그래서 마음을 다독인다.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남은 시간 감당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다시 점검한다.
일상에 빠져서 진정한 우선순위를 쉽게 놓치는 나 같은 이들에게 죽음은 그래서 선물이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게 하고 걸음을 새롭게 하기에 정말로 귀한 선물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 어느 하나 선물 아닌 것이 없다. 태어나서 값없이 누리는 모든 것들, 아름답고 소중한 모든 것들이 선물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부모님과 가족이 선물이고, 첫 울음으로 시작한 이래 그친 적이 없는 호흡이 선물이고, 날마다 육신을 지탱해주는 갖가지 음식도 선물이고, 무엇인가를 남달리 할 수 있는 재능도 선물이고, 일생의 모든 관계들도 선물이다. 참으로 사람이 선물이고 인생이 선물이다. 그리고 그 모든 선물의 끝에 우리에게는 마지막 선물이 주어진다.
죽음이라는 선물! 생명이 선물로 주어졌듯이 죽음도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이 병들고 지치고 곤할 때 주어지는 죽음은 선물이 아닌가. 너무나 무거운 짐을 나를 때 쉼을 갈망하듯, 곤고한 인생을 살다 주어지는 그 쉼과 같은 죽음을 갈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마라톤이 끝도 없이 달려야 하는 코스라면 무슨 희망이 있을까. 42km 남짓 완주하면 코스가 끝난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달리고 또 달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시작과 끝이 있듯 우리 일생에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이 있다는 것만큼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지막 골인 지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마라톤의 희망이듯 죽음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목적이고 희망이다.
그러나 죽음보다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은 새로운 시작이다. 시간과 공간에 갇혔던 이 땅의 삶과 달리 육신의 생명 코스를 완주했을 때 그 너머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 시공의 존재는 늘 제약이었고 한계가 부딪치는 갈등이었고 초월을 갈망하는 목마름이었다. 오아시스를 찾아 다니며 누린 해갈도 잠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영원을 늘 갈망하지 않았던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안에 머무르면서,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문을 지나 영원의 문을 열어주는 그 선물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문득 깨닫는다. 아! 죽음이라는 선물을 두려움이 없이 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선물이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이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오늘도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조정민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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