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멈춤/안보윤 지음/민음사 발행ㆍ212쪽ㆍ1만1,000원
소설가 안보윤(31)씨는 네 번째 발표작인 이 경장편 소설에 타인으로부터 유대를 거부 당하거나 스스로 유대를 거부하는 존재들을 잔뜩 부려놓는다. 오직 제 욕망과 자폐적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이 '외눈박이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풍경을 펼쳐놓는다.
이 잔혹극의 한복판엔 여고생 해정의 가족이 있다. 찜질방에서 제 딸만한 어린 여자들을 더듬다가 경찰 신세를 지는 아버지, 젊은 화가와 불륜에 빠져 집안일과 자녀들을 방기하는 어머니, 학교 친구들에게 '변태 새끼'의 아들로 몰려 성적인 것을 수반한 잔혹한 폭행을 당한 뒤 등교를 거부하는 열두 살 동생 해수,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른 중소기업 사장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30대 건달 기영과 모텔을 드나드는 해정. 뜨내기 남자들과 사이에 낳은 갓난애들을 집안에 유기하는 해수의 심리상담사 선주, 병원에서 몰래 사들인 의료품으로 변두리 여관을 전전하며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순임 등 주변 인물 역시 문제적 인간들이다.
소설은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유대마저 상실한 해정ㆍ해수 남매의 반사회적 행동을 이야기의 두 축으로 삼는다. 해정은 기영과의 관계에 집착하다가 덜컥 임신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영의 살벌한 구타에 이은 결별 선언. 결국 해정은 선주의 소개로 순임을 찾아가 마취마저 풀린 채로 조악한 낙태 수술을 받는다. 더러운 여관방에 홀로 남겨져 거울을 들여다보는 해정. "해정은 거울 속 얼굴이 마음에 든다. 전혀 현실감이 없는 얼굴이다. 정체성과 맹목적인 친근감이 완전히 차단된 얼굴. 단지 낯설고 징그럽기만 한 얼굴."(157쪽)
해수는 지하철에 버려진 아기를 무작정 집에 데려와서는 "내 동생"이라고 부르며 제 손으로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만신창이인 채로 집에 돌아온 해정은 그 낯선 아기가 제 뱃속에서 떼낸 생명이라고 망상하며 아기를 죽이려 들고, 누나를 피해 달아난 해수는 선주를 찾아가 아기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아기에게는 그곳이 사지나 다름없는 곳인 줄 모른 채. 마침 선주를 의심스럽게 여긴 이웃의 신고로 그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의 눈앞엔 엽기적인 신생아 유기의 현장이 펼쳐진다. 그녀에게 죄의식 같은 것은 없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거예요? 착한 아이가 아니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둔 것뿐이에요. 아이들은 내버려 두면 금세 착한 아이가 되거든요."(181쪽)
등장인물들이 대거 경찰서에 모여드는, 연극적인 미장센을 보여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대체 어디서 아기를 데리고 왔느냐는 경찰의 추궁에 쩔쩔매는 부모 앞에서 해정은 "내가 낳았어요. 내 아기예요"라고 선언하며 위악을 부린다. 그리고 경악하는 부모들에게 태연하게 덧붙인다. "모처럼 온 가족이 다 모였는데, 같이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187쪽) "단순히 가족의 불행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괴물성까지 조망한 작품"(문학평론가 김미현)이라는 이 소설에 대한 비평은 안보윤 소설 전반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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