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서울 은평구에 있는 청소년 대안학교인 은평씨앗학교에서 입학식을 했다. 중학교 과정인 은평씨앗학교는 도시형 대안학교이고 학생 수는 많지 않다. 다 모여도 스무 명이 안 된다. 올해 새로 입학한 학생은 모두 네 명이고 전부 남자 아이다. 학교도 크지 않아서 입학식 할 때 아이들과 학부모님이 모두 들어오니까 큰 교실 하나가 꽉 찬다. 입학식은 늘 그렇듯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중 하나가 사회를 맡아서 순서를 이어간다.
대안학교 입학식 모습은 일반 학교와 많이 다르다. 선생님이 앞에 나와서 이끌지 않는다.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축하 공연도 하고 한 사람씩 앞에 나와 다짐을 얘기하는 순서도 있다. 그 중에 오늘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칠판 앞으로 나온 모든 학생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입학식을 구경 온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서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무엇을 평화라고 생각할까. 어떤 아이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또 다른 아이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원 없이 가보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아빠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엄마는 잔소리 하지 않는 게 평화입니다."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모든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게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한 사람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과 평화는 서로 다른 문제다. 평화는 내가 바라는 것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이 함께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자 뜻풀이 그대로 '평온한 상태(平)가 되는(和) 것'이 평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에게만 이루어지면 안 되고 모두 함께 평온한 상태가 되어야 진짜 평화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하나같이 모두 자기가 바라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한데에는 한쪽 편에 '억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게 하고, 나가서 뛰어 놀지 못하게 하고, 아빠는 계속 담배를 피우는데다가 엄마는 아이가 보기에 잔소리꾼이기 때문에 그런 억압이 풀어지면 평화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평화는 이렇듯 묶이고 억눌린 것이 풀어진 상태다.
쉽게 생각하기에 지금 아이들이 말한 건 평화라기보다는 이기적인 소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서 어른들과 평화 협정을 맺고 싶은 것이다. 평화롭지 못하게 하는 주체는 언제나 권력을 가진 쪽이다. 힘이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가지고 억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어른들, 특히 부모님이 그 위치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첫 순서는 대부분 이렇게 자기보다 더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 반항하고 요구하면서 시작한다. 힘을 가진 사람은 힘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평화는 아이와 어른 뿐 아니라 어른들 사이에도 큰 문제다. 과거 새만금이나 4대강사업, 국립공원 케이블카 설치, 그리고 제주해군기지를 짓겠다는 경우를 보더라도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크게 보아 전부 '평화'에 닿아있다. 갯벌과 사람이, 산과 사람이 평화로워야하고 강과 사람이 평화로워야 한다. 구럼비 바위와 사람이 함께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특히 제주도 작은 마을에서 벌써 몇 해 전부터 얽혀있는 이 일을 보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다. 물론 제주도가 군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곳 인건 맞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 평화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평화는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거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총과 칼로 평화를 지켰던 적이 있는가. 무기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은 평화가 아니라 싸움이다.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 할 때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들보다는 간디, 테레사수녀, 무위당 장일순 선생, 작가 권정생이 평화라는 이름에 가깝다. 이 사람들은 무서운 권력을 가지지 않았고 막대한 군사를 거느린 사람도 아니다. 평화는 상대방을 위협해서 얻는 게 아니라 반대로 위협에서 해방시킴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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