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인사들은 "우리나라 의사는 최고의 인재들"이라며 능력의 우수성을 말하곤 한다.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을 거의 성적순으로 모집해 놓은 곳이 의과대학이니 당연한 이야기이다. 내가 의대 교수로서 경험해 보니 이 말은 틀린 게 아니다. 학습능력이 매우 우수하다. 그런데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적성이나 하고 싶은 일과 관계없이 여러 다른 이유로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다. 특히 직업안정성이 의사 선택의 중요한 이유이다. 요즘은 공무원과 교사가 인기 직업 순위에서 상종가다.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초등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장래 희망 순위가 나왔는데, 공무원이 1위였다. 이는 요즘 같이 일자리 불안이 심할 때는 직업안정성이 높은 공무원이 좋다는 부모의 인식이 어린이들의 장래 희망에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업 선택의 보수성은 경제사회 발전의 큰 걸림돌이다.
세상에 일자리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싶다. 우리는 일자리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고, 돈을 벌어 가계를 꾸리고, 사회적 관계망을 만듦으로써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일자리 없는 좋은 삶이나 행복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바로 이 일자리에 큰 문제가 생겼다. 일자리가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졌고, 일자리 간의 격차가 심해졌다. 노동시장이 10%의 좋은 일자리와 90%의 나쁜 일자리로 뚜렷하게 양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나쁜 일자리에 들어서면 거기서 빠져나와 좋은 일자리로 이동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바,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는 우리 경제사회의 핵심적 문제이자 근원적 사안이므로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개개인의 불행을 넘어 더 이상 우리사회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일자리 문제는 지난 10여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노선의 결과물이다. 갈수록 심화된 수출경제와 내수경제의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등 우리나라 경제 산업구조의 총체적인 양극화가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함께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양산하였다.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가 국민경제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동안 '삼성동물원'으로 비유되는 경제체제의 불공정성이 극에 달하였다. 일자리 문제의 해결을 위해 경제민주화가 절실한 이유이다. 그리고 회사가 평생고용과 복지를 보장해주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 경제사회의 안정성과 역동성을 위해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한다. 어느 회사를 다니든, 무슨 일을 하든, 모든 국민은 정부의 보편적 복지를 통해 사회서비스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보편적 고용보험의 내실화, 직업훈련과 평생교육 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일자리 불안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여기에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책임 있는 정부의 적극적 산업정책과 공정한 조세재정정책이 더해져서 일자리의 양극화와 불안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누구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다. 그러나 안전망으로서의 매트리스가 깔려있다면 최소한 중상이나 사망은 면할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러한 사회안전망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실패하여 떨어진 사람들이 다시 기회를 얻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경제사회의 창의적 도전정신과 역동성이 높아진다. 이를 위해서는 도전과 도약을 위한 제도적 발판이 필요하다. 즉, 국가는 추락을 받쳐주는 사회안전망 역할과 함께 도전과 도약을 뒷받침 해주는 뜀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두 수레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책임 있는 복지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이다. 역동적 복지국가를 꿈꾸는 우리 국민은 총선을 앞둔 여야 정치권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 과제를 놓고 본격적인 정책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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