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이르지도, 또 너무 늦지도 않은 밤 열한 시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면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네 가장들이 있다. 일단 축 처진 어깨에다 잿빛 모직 코트에 무릎 나온 코듀로이 바지에다 두툼한 목둘레에 짧은 귀밑머리에다 그 술, 술 냄새까지.
이상한 것은 터덜터덜 잘도 걸어왔으면서도 현관 앞에 서면 에잇, 뒤돌아버리는 이들이 꽤나 있더라는 얘기다. 술기운에 못 이겨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흔들리는 대로 한 잔을 재현하면서도 바싹 휴대폰을 귀에 갖다 붙이고 하염없이 불러대던 그 이름 순이야, 엄마야. 왜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순이는, 엄마는, 어쩜 그리 순식간에 내 친구이자 내 엄마로 탈바꿈이 되나.
대머리독수리라고 불리는 19층 아저씨,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과 담배 연기를 차례로 뿜어대는데 몇 가닥 안 남은 가르마 뒤쪽 머리카락이 자꾸만 가르마 앞쪽으로 넘어와 눈을 가린다. 이 타이밍에 인사성 밝은 내 스타일을 고수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 공동 현관문이 열린다.
오리털 점퍼에 맨발로 운동화를 구겨 신은 한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어, 샀어. 오이 한 개에 천오백 원이래. 네 개 샀고, 맥주도 세 병 샀어. 기다려 자기." 그의 손에 들린 까만 비닐봉지 밖으로 삐죽이 나온 오이에다 기다려 자기, 라니. 역시 신혼은 남자를 귀찮게 하네그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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