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여러 차례 양요(洋擾)를 겪고 진위대의 의병 항쟁도 있었던 터라 강화 사람들은 저항 정신이 강했다. 3·1 운동 때 전국 어느 도시보다도 크게 만세시위를 벌였다.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던 평범한 청년 조봉암도 참가했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유봉진(劉鳳鎭) 선생. 죽산에게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었다. 선생은 강화진위대 출신이었다. 1907년 진위대가 봉기했을 때 앞장섰으며, 진압하러 출동한 일본군을 타격한 갑곶진 매복전투에 참가했다. 그 뒤에는 교사로 일했고 경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황도문(黃道文) 황유부(黃有富) 염성오(廉成五) 등과 손을 잡고 강화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3월 18일 강화읍 장날을 거사일로 잡았고 그 소식은 은밀히 신문리 잠두교회로 전해졌다.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투옥
그날이 왔다. 시위 군중은 6,000여 명. 잠두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시위에 참가했고 청년 조봉암도 끼여 있었다. 곁에 영민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이름은 김이옥(金以玉), 신문리 대부호의 딸로 경성여고보에 다니고 있었다. 경성 탑골공원의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귀향한 것이었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군청을 향해 진격했다. 경찰서를 포위하고 조선인 군수와 조선인 경무과장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다. 강화섬의 중심 지역을 그렇게 점거했던 시위대는 밤 11시가 넘어 해산했다.
다음날 인천경찰서로부터 경찰과 군 병력이 증강되어 왔고 곧바로 검거 바람이 불어 닥쳤다. 43명이나 되는 지도자들이 체포돼 다시는 시위를 벌이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강화 사람들의 몸에는 끈질긴 저항정신이 배어 있었다. 조봉암과 구연준(具然濬) ․ 김한영(金翰永) ․ 김영희(金永禧) ․ 주창일(朱昌日) 등 청년층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불길이 꺼졌다. 우리가 불쏘시개가 되어 만세시위의 불길을 일으키자.'
그들은 그렇게 결의한 뒤 여러 종류의 격문을 만들고 각기 다른 장소로 흩어져 그것을 베끼는 일을 했다. 4월 초순에는 경성에서 애국청년들이 급히 만든 등사판 신문 <자유민보> 가 강화로 들어왔다. 전국 만세시위의 상황이 고스란히 기록된 신문이었다. 봉암과 동지들은 그것을 베껴서 은밀히 배포했고 거기에 김이옥도 끼어 있었다. 자유민보>
조봉암과 젊은 동지들의 노력으로 강화의 만세시위는 들불처럼 다시 일어났다. 본섬 구석구석, 그리고 교동도, 석모도 등 부속 섬으로 퍼져 나갔다. 검거의 손길은 여지없이 뻗쳐왔고 조봉암도 체포되었다. 20일 동안 혹독한 고문취조를 받았으나 김이옥이 가담한 사실만은 끝까지 불지 않았다.
그는 5월 4일 경성검사국으로 송치되고 서대문감옥 감방으로 이송되었다. 그가 들어간 감방에는 이미 수인 8명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함경도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가순(李可順) 선생이 있었다. 이분은 음악인 정명화ㆍ정경화ㆍ정명훈의 외조부로 이 밖에도 존경 받을 만한 많은 일을 하신 분이다.
죽산은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일본인 간수에게 반말로 대답하고, 법정에서 재판장에게도 그렇게 했다. 고향에서 '원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명성이 높던 그는 감방 안 젊은이들에게 자주 훈시를 했다. 봉암은 피상적으로만 느껴오던 민족의식, 애국심, 독립정신 같은 것이 생명처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감방에서는 옆 감방과의 연락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재소자들은 벽을 두드리는 신호를 교환해 간수가 멀리 있음을 확인하고 소곤거리는 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을 '통방(通房)'이라고 했다. 봉암은 젊고 눈치가 빨라 통방꾼 노릇을 했다.
독립투사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풀이 죽지 않았다. 이따금 통방꾼의 연락을 통해 전체 감방이 약속을 하고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만세! 조선독립 만세! 침략자 일본은 물러가라!"
느닷없이 모든 감방에서 만세를 외치면 서대문감옥은 난리가 났다. 몽둥이를 든 간수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다니고, 몇 사람을 찍어내 매질이나 고문을 가했다. 조봉암도 몇 차례 붙잡혀 나갔다.
죽산의 자전적 기록인 <내가 걸어온 길> 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내가>
나도 가끔 걸려들어서 매여 달리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하루는 또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 문짝을 발길로 차고 날뛰다가 또 붙잡혀 나갔다. 나는 붙잡혀 나가면서도 기를 쓰고 만세를 불렀다. 놈들이 가죽 띠로 마구 갈기면 갈길수록 악을 써가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니까 놈들은 독사같이 약이 바싹 올라 가지고 발길로 차고 혁대로 갈기면서 "이놈의 자식, 만세 한 번에 혁대 한 번씩 해보자. 어느 편이 이기나 보자" 했다. 그래서 나는 몹시 빨리 만세! 만세! 만세! 하고 한 삼사십 번을 연해 불러댔더니 놈들은 기가 막혔던지 "참 알 수 없는 자식이로군"하고는 때리는 경쟁은 그만두었으나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기절한 채로 콘크리트 바닥에서 하루 밤을 새운 일이 있었다.
재미도 있지만 슬픔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악착같이 저항하는 청년 조봉암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1920년 봄 감옥에서 나온 조봉암은 경성 종로의 중앙기독청년회관 중학부에 입학했다. 교장격인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30대 초반에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대한제국 말기에 외교관도 지냈다. 서재필(徐載弼) 남궁억(南宮億) 윤치호(尹致昊)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한 경력이 있었으며 나라가 망한 뒤에는 YMCA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이끌면서 이 시대의 가장 존경 받는 지도자로 떠올라 있었다. 그 해 70세였으나 카랑카랑하고 힘찬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훈시했다.
"범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정신을 차려 빼앗긴 나라를 찾아라."
동급생들 중 인천 출신인 박남칠(朴南七)이 그를 따랐다. 그보다 세 살 아래였으며 인천에서 크게 미곡상을 하는 박삼홍(朴三弘)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만난 박남칠과의 인연은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간 복역하고 나온 죽산이 인천에 자리잡고, 광복 후 정치적 기반을 잡게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대동단 사건으로 다시 구속
죽산은 1920년 5월, 뜻하지 않게 대동단(大同團) 사건으로 평양경찰서로 끌려갔다. 대동단 사건이란 1919년 11월, 대동단 단장 전협(全協) 등이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망명시켜 임시정부 지도자로 추대하려다가 압록강 건너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ㆍ丹東)에서 일경에 발각된 사건이다. 죽산은 전혀 모르는 단체였다. YMCA의 학감 최경희(崔慶喜), 유도사범 박재영(朴在英) 강낙원(姜樂遠) 등이 얽혀 있었는데, 경찰이 3ㆍ1만세 전력이 있는 조봉암의 이름을 대며 고문을 하자 셋 중 누군가가 이기지 못하고 시인한 것이었다. 조봉암은 평양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뒷날 <내가 걸어온 길> 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비행기를 태운다고 해서 두 팔을 뒤로 묶어서 그 묶은 두 손목을 끈으로 매어서 천정으로 끌어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옛날 말로는 주릿대 방망이에 학춤을 춘다는 것이고, 또 둥근 의자에 눕혀놓고 혁대 혹은 검도용 마구로 두들겨 패고 벌거벗겨진 궁둥이를 담뱃불로 바싹바싹 지지기도 했다. 견디다 못해서 기절을 하면 냉수를 이마로부터 뒤집어쓰고, 그러면 사오 분 뒤에는 소생했다. 기절했다가 냉수를 뒤집어쓰고, 다시 제 정신이 돌아설 때처럼 서글픈 일은 없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때는 눈물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혐의가 없어 결국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조봉암의 정신은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감옥이 나를 애국자로 만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며 경성행 기차를 탔다. 가슴에는 불이 솟구치듯 일제에 대한 반항심과 독립투쟁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몇 달 전 소년시절 친구인 유찬식이 그에게 일본으로 와서 같이 고학하며 공부하자고 써 보낸 편지를 갖고 있었다. 가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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