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에겐 소멸의 아쉬움, 누군가에겐 새로운 공간…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세상에 영원이란 없음을 너무나 잘 알지만 사라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눈물로 끝나는 수많은 멜로드라마에는 그래서 자주 죽음의 설정이 포함되는 것 아닐까.
여기 한 편의 연극이 있다. 툇마루와 좁은 뒷마당이 객석을 향하도록, 오래 묵은 한옥이 뒤로 돌아앉아 있는 무대. 여느 작품보다 짧다 싶은 1시간 20분의 공연 시간. 주인공은 80대 중반의 노인 장오와 그의 환상으로 나타나는 아내 이순.
두 노배우의 깊은 호흡이 돋보이는 연극 '3월의 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라짐과 그에 담긴 순환의 섭리를 드러내 먹먹한 감동을 전한다. 창작 인프라가 열악한 한국 연극계에서 이 작품은 드물게 지난해 초연하자마자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으며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이자 명작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1일 막을 올려 18일까지 이어지는 재공연에도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연극에는 이야기의 배경이 된 지역이 특정돼 있지 않다. 장오의 낡은 한옥이 자리한 도시의 변두리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관광지처럼 변해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그곳'은, 개발과 상업화의 물결에 밀려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이 땅의 모든 옛 동네일 터. 서울 삼청동 역시 그런 동네 중 하나다. 2005년부터 이곳에 터잡고 살고 있는 극작가 배삼식씨는 직접 목도한 상전벽해의 변화에서 이 작품을 길어올렸다.
한적함 찾아 둥지 튼 삼청동, 그곳이 달라졌다
연극은 툇마루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대며 뜨개질을 하는 이순과 외출했다 돌아와 느릿느릿 집안으로 들어서는 장오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순이 이발소에 다녀왔다는 장오의 모자를 벗기고 확인해 보지만 머리는 그대로다. "에게? 이게 깎은 거유?"하고 묻는 이순에게 장오는 푸념하듯 말한다. "김씨가 이발소 문 닫고 딴 사람한테 세를 놨다드군. 만두집을 들인대나. 벌써 다 들어내구 공사허느라 야단이데. 중국만두를 맨들어 판대나, 중국서 사람을 불러다가. 젊은 애들이 그걸 좋아한다네."
10일 오후 찾은 삼청동의 골목골목은 타인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 걸기 어려울 만큼 붐볐다. 마치 숙어처럼 삼청동에 따라붙는 '한국적 정서'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독 쇼핑객이 많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젊은 여성들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옷과 구두 매장에 바삐 드나들었고, 지도를 펼쳐 든 중년의 일본 여성들은 연신 "스고이(놀랍다)"를 외쳐댔다.
배씨를 만난 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부근 풍문여고에서 정독도서관 쪽으로 가는 골목에 자리잡은 중국식 만두집. "예전에 여기에 할아버지 한 분이 운영하던 이발소가 있었어요. 작품 초반에 나오는 김씨 이야기의 모델이죠. 여기서 늘 머리를 깎았었는데…. 어디 이발소뿐인가요? 삼청동은 정말 엄청나게 변했어요. 예전 모습이 기억이 안 날 만큼."
그는 삼청동에서 7년째 살고 있다. 그간 많은 게 달라졌다. 이 동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던 고즈넉함은 사라진 지 오래. 오가며 추측하기에 가난한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인 듯 보였던 낡고 허름한 건물은 대형 화장품 매장으로 바뀌었고 오밤중에도 필요한 물건을 금세 공수할 수 있어 좋았던 집 근처 구멍가게는 갤러리 겸 찻집이 됐다. "처음에는 그저 외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시끄럽게 떠드는 게 보기 싫다는 생각만 들었다"는 그가 그렇게 보고 느낀 것들은 작품의 소재가 되어 깨알같이 연극에 녹아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휴식처일 삼청동
'3월의 눈'은 그저 쉽게 사라지는 것에 대한 회한을 말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 연극의 묘미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무대에 강렬하게 드러냄으로써 관객이 역설적으로 소멸 후의 생생한 결핍을 느끼고 감지하게 만들었다"(연극평론가 김방옥)는 데 있다. 재개발 광풍에 밀려 내일이면 한옥을 곧 떠나야 할 처지이지만 장오는 늙은 아내의 혼과 함께 문짝의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여기에 연출가 손진책씨는 장오가 떠난 후 이순의 혼령만 홀로 남은 툇마루에 비치는 아침햇살을 유난히 따사롭고 아름답게 연출했다.
연극은 사라짐뿐 아니라 사라짐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삶의 순환의 이치를 담고 있다. 집을 떠나기 전 장오의 마지막 대사는 그런 주제의식을 오롯이 드러낸다. "그래두 이 집이 나보다 낫군. 흩어질 땐 흩어지더라두, 뭐가 되든 된다네. 책상두 되고, 밥상두 되고, 허허. 섭섭헐 것두 없구, 억울헐 것두 없어. 빈손으루 혼자 내려와서 자네두 만나구, 손주, 증손주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괜찮지, 괜찮구 말구.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7년 사이에 전셋값을 두 배로 올려 놓은" 삼청동의 변화에 화를 내다 차츰 외지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배씨의 생각의 변화가 반영된 대목이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들이 무슨 죄인가, 저들도 결국 삶에 지쳐 잠깐 숨쉬려고 이곳을 찾은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한옥마을도 192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에 집 장수들이 20~40평 규모의 작은 주택들로 분양한 거라고 하잖아요. 결국 어떤 나쁜 의도가 있지 않아도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어떤 공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게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인 거죠."
'생성하고 소멸하는 삶의 순환'은 그의 최근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세계관이다.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을 받은 2009년작 '하얀앵두'가 그랬고 지난해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이 공동 제작한 '벌'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어떤 정해진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파고 들어가기보다 모든 것은 흐름 속에 있다고 보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흐름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사라져가는 게 아쉽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며 지금 사라져 가는, 그래서 내가 아쉬워하는 것들도 뿌리를 더듬어 보면 그 전에 아쉬운 무언가를 밀어내고 생성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이들은 삼청동의 옛 정취가 사라져 버렸다며 한탄해 할 테고 또 다른 이들은 여전히 서울에서 정말 볼 수 없는 정취가 있는 곳이라고 하겠죠. 또 알아요? 수십 년 후에는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상업화된 이 풍경이 보존해야 할 그런 것이 될는지."
그래서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딱히 없다고 했다. "내 욕심은, 이 삼청동 거리가 달라져 버렸지만 살다 간 사람의 아직 변하지 않은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제 본뜻은 어떤 판단 없이 공간과 삶이 변화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어찌 보면 차가울 정도로 던져 놓은 거지만 보는 분마다 이야기에 각자의 의미들을 투사하는 것 같아요. 집을 판 돈으로 손자가 빚을 갚게 하고 스스로 요양원행을 선택하는 장오의 모습에서 따뜻한 부성애를 읽는 관객도 있고, 사라져 간 날에 대한 향수로 받아들이는 관객도 있을 테고."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흘리는 관객 중에는 젊은 관객이 유독 많다고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 이야기가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 이야기인지 아시는 것 같다"고 했다.
최고의 경지를 보여 준 '연기하지 않는 연기'
집을 떠나기 직전 장오는 마지막으로 이순과 인사를 나눈다. 이순이 뜨개질로 하다 채 완성하지 못해 한쪽 팔이 없는 빨간 카디건을 걸치고 이순을 꼭 끌어안는다. 삶의 마지막에 도달해 가고 있음을 예감한 듯 "조만간 내가 여기루 와야겠구먼. 이거 마저 떠 입으려면"이라고 말하는 장오에게 이순은 "츤츤히, 츤츤히 와요"라고 답한다.
이 작품을 두고 침묵극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큰 움직임 없이 평범한 일상처럼 무심하게 나누는 노부부의 대화 속에 이야기의 줄기와 감성이 모두 담겨 있어서다.
배씨는 지난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야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말의 참뜻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연극계의 두 거목 백성희, 장민호씨는 배우들이 가장 이상적인 연기로 꼽는 '연기를 하지 않는 연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대본 연습 첫날 장민호 선생님이 대사 첫 줄을 읽으신 순간, 저는 극작가로서 얻어야 할 기쁨은 모두 얻었어요. 제가 신뢰하는 안목을 가진 연극계 선배 한 분은 공연 관람 후에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 선생님 최고의 연기를 봤다고 하셨고."
이번 공연은 병중인 장씨를 대신해 박근형씨가 백성희씨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또 다른 장오-이순 부부인 오영수, 박혜진씨와 번갈아 출연한다. 이번 무대에서도 배우들은 침묵극에 가까운 연극에서 느린 호흡의 내면 연기로 '연기하지 않는 연기'의 내공을 발휘한다.
배씨는 "6ㆍ25전쟁부터 1960년대의 경제개발, 민주화 운동 등 한 개인사에 한국의 현대사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의 그런 바람 때문일까. 연극은 한국 현대극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배우들의 개인사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제목으로 쓰인 3월의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괜스레 설레게도 하지만 언제 찬란하게 흩날렸냐는 듯 땅에 닿?순간 고요하게 사라진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느낌도 비슷하다. 사라짐이 슬퍼 눈앞이 부얘지지만 가슴 한 구석에서 여린 듯 묵직하게 솟아나는 희망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 냉정을 되찾게 된다. 누군가에겐 아쉬움만 남긴 채 사라져가는 흔적인 삼청동이 다른 이들에게는 새롭게 발견한 삶의 쉼터가 되듯.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 '3월의 눈' 공연되지 못할 뻔했던 사연
'3월의 눈'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개관작으로 지난해 3월 11일 첫 선을 보였다. 극단의 주역이자 원로단원인 백성희(87), 장민호(88)씨의 업적을 기리고자 배우의 이름을 딴 최초의 국립극장이다.
지난해 서울 초연 이후 앙코르 공연과 주요 지방 공연, 중국 공연을 거쳐 국립극단이 다시 올해 첫 레퍼토리로 선보이고 있는 명작이지만 자칫 무대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작가 배삼식씨는 "평범한 축하 행사가 아닌 개관 기념 공연으로 극장을 열고 싶다"며 신작을 제안해 온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에게 처음엔 거절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너무 다급하게 연락을 주셨거든요. 2011년 3월 초에 공연하고 싶다면서 2010년 12월 말에 처음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그래서 안톤 체홉 작품처럼 기존 작품 중에 찾아보시라고 했는데 꼭 창작 공연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손 감독은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분장실에서 배우로서 두 분이 앉아서 살아 온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형식의 희곡도 좋다"고 설득했지만, 배씨는 처음 거절할 때부터 분명한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자전적인 두 분의 이야기를 끌어내기보다 정말 배우로서 한 배역을 온전히 소화하게 만들어 드리는 게 진짜 경의"라는.
배씨의 수많은 고민은 명동의 한 밥집에서 두 배우를 처음 만나는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면서 "볕 좋은 어느 집 툇마루에 두 분을 앉혀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시일이 촉박하니까 별 수 없이 한옥이라는 공간에 사는 내 삶의 흔적을 작품에 녹이게 됐지요."
그래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목은 '툇마루'였다. 두 노배우의 주된 동선이 교차되는 지점이자 장오가 떠난 후 가장 먼저 뜯겨져 나가는 공간이 대청마루와 툇마루다.
'3월의 눈'은 작품 탈고 후 확정한 제목이다. 3월의 눈이 조용히 시작됐다 사라져 가는 존재이기도 하고, 공연 일정이 3월에 잡혀 있던 때문이기도 하단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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