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
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뿜어대던 열기를 삼키며 제 색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모양이다 삘딩으로 뒤덮인 거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하디 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
(중략)
깨어진 구두코에 내린 어둠을 구두약처럼 슬슬 문질러대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오는 아내와 시래기 마르는 처마 아래서 나물을 다듬는 어머니의 집 간난도 설움도 불빛 하나로 단촐해진 지붕을 찾아가리라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
● 에밀 시오랑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재앙을 분비한다." 이런 구절을 입에 달고 다니다가 시인의 시를 읽으니 숙연해집니다. 모두가 시인처럼 색을 흐릴 줄 알면 좋으련만. 양자택일로 사는 일이 대부분이죠. 딱딱하게 굳은 물감처럼 아무데도 섞이지 못하고 귀머거리로 버티거나 아니면 거기 내가 있던 흔적도 없이 휩쓸려 가버리거나. 얼마쯤만 놓치는 것, 지워지지만 아주 지워지지는 않는 일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시인처럼 망원역 앞에서 버스도 기다려보았고 깨어진 구두코에 내린 어둠을 구두약처럼 슬슬 문질러도 보았고 학창시절 수채화도 그려보았는데 말이지요. 곁의 사람에게 재앙을 마구 뿌려대면서 시인의 수채화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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