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14일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정치체제 개혁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문화대혁명과 같은 역사적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 총리는 또 지난달 미국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한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重慶)시 부시장 사건과 관련해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 서기와 시 정부가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식 서열 3위인 원 총리가 수십만명의 희생자를 낳고 중국 지도층 사이에서 언급 자체가 금기시돼 온 문화대혁명을 인용하며 정치 개혁을 촉구한 것은 이례적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공산주의청년단 계열로 분류되는 그가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태자당(太子黨ㆍ혁명 원로 및 고위 간부 자녀)의 보 서기를 공개 비판함에 따라 올 가을 지도부 교체를 앞둔 중국에서 정파간 다툼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당과 국가 영도 체계까지 개혁 주장
원 총리는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 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그 동안 정치 개혁을 반복해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작심한 듯 "책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이에 따른 분배가 공정하지 못했으며 부정부패 등 다른 문제들도 많이 발생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체제뿐 아니라 정치체제 개혁을 함께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원 총리는 특히 "당과 국가의 영도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현재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중국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어떤 형태로든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원 총리는 "개혁이 중요한 순간에 와 있다"며 "이제 정치체제 개혁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경제도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얻은 성과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책임 있는 당원과 간부라면 마땅히 긴박감을 느껴야 한다"며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한 중국의 개혁ㆍ개방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공청단의 태자당 공격 본격화
원 총리는 왕리쥔 사건 관련 질문에 "중앙은 이 사건을 중시하고 있으며 사건을 사실에 입각해 법률에 따라 엄정히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당 11기3중전회(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역사적 문제'(문화대혁명)를 처리하는 결의를 통과시킨 이후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당의 기본 노선으로 삼아 개혁과 개방을 추진해 왔다"고 역설했다. 원 총리가 보 서기를 공개 비판하며 1978년의 11기3중전회 정신을 부각한 것은 그 동안 '홍색 바람'을 강조해온 보 서기의 좌경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풀이된다.
후 주석이 최근 왕 전 부시장을 '반역자'로 낙인 찍은 데 이어 원 총리가 보 서기를 직접 비판한 것은 공청단의 정치 공세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또 후 주석으로부터 권력을 넘겨 받을 시 부주석이 태자당이라는 점 때문에 중국의 신ㆍ구 지도부간 권력 이양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후 주석이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은 시 부주석에게 물려주더라도 실질적 최고 권력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쉽게 넘기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정덕구 런민(人民)대 초빙교수는 "중국은 경제 성장과정에서 쌓인 인민의 불만이 정치적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이라며 "시장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봉합한 중국을 야구공으로 비유한다면 이제는 공의 몸집이 커져 실밥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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