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선거다. 정권을 향한 분노가 방바닥을 채운 휘발유처럼 흥건한데 심판의 불은 붙지 않고 있다. 민간인을 사찰하고, 사건이 불거지자 주범과 그 배후는 관련자에게 "검찰이 봐주기로 했으니 입을 다물라"고 하는데, 사찰 피해자는 오히려 온갖 고초를 겪는 이 시대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뿐인가. 이명박 대통령 주변 비리, 내곡동 사저, 디도스 공격,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등 숱한 추문들이 잇따르고, 온갖 자리에 실세나 청와대 입김이 미치는 인사 난맥상에 울분을 삭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심판의 바람은 거세지 않다.
희한한 일이다. 무슨 큰 사건이 없었는데도 과반수 의석 확보를 장담하던 야당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현 정부를 옹호하는 말을 하면 '개념 없는 꼴통'으로 치부돼 '이명박' '보수'라는 말은 저자 거리에서도 자취를 감췄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심판' '진보'라는 말이 눈치를 보며 나오는 형국이 됐다.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다들 공천 잘못이라고 말한다. 도덕성을 내걸고 1심 유죄판결을 받은 임종석 사무총장을 1차로 공천했으니 그런 무감각과 오만함은 기가 찰 일이다. 임 총장이 공천을 반납했지만 차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선거 기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선 공천을 보면, 이미지 상으로 새누리당은 '친이계 학살'로, 민주통합당은 '친노 일색'으로 규정되고 있다. 문제는 친이계 배제가 현 정권의 실정에 책임을 묻는 것으로 비치고, 친노 일색은 '도로 열린우리당'이라는 과거 회귀로 분칠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진실이 아닐지라도, 감각적으로는 친이계가 아우성치면 칠수록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정권심판자의 위상을 갖게 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전선(戰線)도 엉뚱한 곳에 형성됐다. 정권 비리나 실정을 둘러싸고 난타전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민주당과 재야 시민단체가 스스로 그 싸움에 뛰어들었다. 한미 FTA나 해군기지는 시위 현장에서는 분노가 치솟아 오를지 모르지만, 이성적으로는 반대도 일리 있고 찬성도 나름 근거가 있다는 회색지대의 테마다. 반대하더라도 '반대 55대 찬성 45'의 유보적 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해군기지만 해도 안보상 필요한데, 주민 설득 절차가 부족했다는 이중적 판단이 형성돼 있다.
따라서 이 전선에서는 민주당이 승세를 잡기는 쉽지 않다. 특히 한미 FTA나 해군기지는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된 일이다. 민주당이 반대하면 할수록 "그러면 왜 지난 정권 때 추진했냐"는 추궁에 답해야 하는 자가당착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해명 논리도 군색하다. 한미 FTA에 대해 이명박 정부의 재협상에서 자동차 부문 이익을 다 내줘 이익균형이 깨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동차 부문의 이익을 되찾으면 정책주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들을 그대로 둬도 좋다는 말인가. 전략적 사고를 가졌다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개방과 신자유주의 신화가 깨졌고 각 나라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에서 논리를 찾아야 한다. "그때는 개방 신화에 빠져 있었다. 금융위기가 착각을 깨닫게 했다. 우리가 추진했다 해서 현 정부의 재협상으로 더욱 잘못된 한미 FTA를 그대로 진행시킬 수는 없다"는 식으로 반성에 바탕을 둔 반대론을 개진한다면 그나마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번 총선은 연말 대선과 맞물려 있어 "미래 권력을 선택하는 중대한 선거"라는 새누리당의 의미 부여가 상당 부분 먹혀 심판론이 희석되고 있다. 하지만 선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민주당의 전략적 미스가 중첩됐지만, 아직도 민심의 바닥에는 분노가 흥건하다. 이곳에 불이 붙느냐, 아니면 아예 판이 다른 곳에 벌어지느냐에 따라 흐름은 달라질 것이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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