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우등생 선배의 갑작스러운 출가를 접하고 문학의 길에 이끌렸다. "이상 같은 옛 작가들의 방랑하는 삶이 멋있어서" 대학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유랑하다가 스물일곱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오로지 글만 쓰겠다며 취직도 마다한 이 늦깎이 소설가 지망생은 그러나 등단의 꿈을 이루기까지 장편 공모 최종심에서만 아홉 번 떨어지는 고초를 겪으며 무려 20년을 인내해야 했다.
마침내 올 초 상금 1억원의 장편 공모상인 제8회 세계문학상에 당선돼 등단한 전민식(47)씨. 당선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은행나무 발행) 출간을 맞아 13일 기자들과 만난 전씨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소설이 과연 내 길이 맞나 의심하면서도 여기서 고꾸라지면 안된다는 각오로 해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개를>
이번 소설은 잘 나가던 기업 컨설턴트에서 한 순간에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한 27세 남자 주인공이 절망을 이겨내며 재기를 모색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다. 산업스파이와의 눈먼 사랑 탓에 직장을 잃은 그는 고깃집 불판을 닦고 심부름센터에서 '역할 대행'을 하며 근근이 살다가 유력가의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일을 맡아 젊은 여주인의 환심을 사는데,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에 전씨의 실제 체험이 많이 녹아있다고 한다. 전씨는 "평범하게 살다가도 언제든 절망으로 떨어질 수 있는 '99%'의 현실과 그들의 삶을 각박하게 내모는 사회를, 비록 개선될 수는 없겠지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먼저 소설가로 등단한 부인 최민경씨와 여섯 살짜리 아들을 건사하고 있는 전씨가 그동안 주요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은 대필. 그가 ' 유령 작가'로 펴낸 책이 50~60권에 이른다. "뭐든 다 썼다. 자서전은 물론, 한의학ㆍ풍수 분야 전문서도 직접 자료를 공부해가며 썼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몇 권 있는데, 이 중 한의학 소재의 소설은 지상파 TV 드라마의 원작이 됐다." 지금은 세상을 뜬 거물급 조폭 인사의 자서전을 쓰느라 반 년 정도 온양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숙식하기도 했다고. 문우(文友)들은 "그렇게 대필 많이 하면 문장이 망가진다"며 혀를 찼지만, 정작 그는 "길게는 6개월을 만나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 소설 쓰는 입장에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긍정한다.
전씨의 부친은 그토록 기다렸던 장남의 당선 소식을 들은 뒤 지난달 29일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전씨는 황망히 초상을 치르는 와중에도 주문 받은 글을 쓰느라 부조 받는 탁자 위에 노트북을 펴야만 했다. "생활을 위한 일에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다. 대필만 해도 글 갖다 주면 내용이 맞니 틀리니, 왜 이 따위로 썼니 같은 말을 늘상 듣는다. 소설은 내가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비록 세상은 나를 몰라도, 내가 나를 알아주고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그거 하나 지켜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여기까지 온 듯싶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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