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30대 중반의 성철 스님 주도로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한국 불교 중흥 결사가 만들어졌다. 선종 본디의 종풍을 살려 옛 총림의 법도를 되살리자는 이 운동에 전국에서 젊은 승려들이 참여했다. 청담, 향곡, 자운, 월산, 우봉, 보문, 성수, 도우, 혜암, 법전…. 그때 모인 이들 가운데 뒤에 조계종 종정이 된 사람이 4명, 총무원장 된 이가 5명이다.
어느 날 그 용맹정진하던 선방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성철 스님이 스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밥값 내놓그래이."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손찌검이 날아들고 멱살잡이가 들어온다. 수행도장이 아니라 아수라장이다. "곰새끼들아, 공짜로 묵었던 밥값 내놓그래이." 나태한 것은 보고 넘기지 못하는 성철 스님 특유의 된서리였다.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지낸 청담 스님이 "해인사 팔만대장경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성철(1912~1993) 큰 스님 탄생 100주년(11일)에 맞춰 스님의 가르침과 일대기를 담은 <성철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전 2권) <성철 스님 행장> (이상 글씨미디어 발행)이 함께 출간됐다. 성철 스님의 상좌승이었던 원택 스님이 스님의 행적을 되짚어 가며 말씀과 일화를 정리해 스님 사진과 함께 묶은 책이다. 성철> 성철>
<성철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1권에서는 서울 도선사, 양주 회암사지 등을 청담, 향곡 스님과 함께 찾은 모습, 문경 김용사에서의 운달산 법회, 1967년 해인총림 방장으로 취임한 후의 상당법어 등을 만날 수 있다. 2권에서는 백련암 은거 30여년의 모습과 해인사 방장 취임 무렵부터 입적할 때까지 여러 스님과의 인연이 담겨 있다. 스님을 찾아온 서정주 시인과의 한 컷, 어린아이들에 둘러싸인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볼 수 있다. 성철>
두 책 끝에는 성철 스님이 자신의 대표 저술 <선문정로(禪門正路)> 의 요점을 직접 발췌하고 보충 설명한 육필 원고 '화두 참선의 길' '바른 길'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역시 원택 스님이 엮은 <성철 스님 행장> 은 스님 출생부터 입적 때까지의 행적을 한국 불교 100년 역사와 함께 되짚었다. 성철> 선문정로(禪門正路)>
원택 스님은 책에서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골라서 그대로 싣거나, 거기다 약간의 해설을 붙여 큰 스님이 한국 불교의 근본이라고 한 '중도' 사상 같은 개념이나 가르침을 풀이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며, 불교를 믿는 사람은 승려를 따를 것이 아니라 부처를 따르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신부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라고 했던 성철 스님은 또 불교를 믿는 사람은 석가모니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버리라고도 한다. '성인과 악인을 다 버리고 나면 푸른 허공과 같이 깨끗하게 되니 이 허공까지 부셔야 본마음을 본다'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 나무라기는 속가의 딸인 불필 스님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성철 스님은 공부가 안 되어서 법문 들으러 왔다는 불필 스님에게 "니들한테 법문할 거 없다. 언제 공부나 해봤나"고 꾸짖었다. 백련암 시절 신도 중 재벌 부부가 있었는데 겨울 혹한에 누더기 차림의 스님이 보기 딱해서 털내의를 사오겠다고 하자 스님은 이렇게 일렀다. "처사가 경영하는 회사원들, 특히 공장의 근로자들에게 환희심을 갖고 털내의를 선물해 주그래이. 그 길이 보살의 길이요, 참 불공인기라."
스님은 '화두 참선의 길'에서 '참선을 하다가 망상 가운데서 알았다는 병이 나면 공부는 영영 못하'는 것이라며 해오견성설(解悟見性說)이 종문(宗門)을 근본적으로 망쳐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참답게 정진한다면 삼사 년 안에 내외명철이 되어 크게 깨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종문 전반을 통하여 참답게 정진하는 사람은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고 꼬집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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