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화이트 데이. 그 유래를 두루 검색해봤으나 이렇다 수긍할 만한 기록은 없고, 다만 분명한 건 장삿속에 의거한 이벤트의 날이라는 거지. 어제만 해도 그랬다. 당장 찍어 바를 화장품이 똑 떨어져 퇴근 직후 부랴부랴 백화점에 들렀더니 무슨 큰 어른 오신 날이라도 되는 양 광고 일색이지 뭔가.
설날 추석 같은 대목이 예 있었구나, 하며 화장품 매장을 둘러보는데 곳곳에 남녀 커플들 심심찮게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내 옆 이 커플,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작정은 진열대 위에 이런저런 제품을 순식간에 늘어놓게 했고, 마치 오늘만은 피하겠다는 듯 남자의 작심은 진열대 위에 놓인 이런저런 제품을 순식간에 치우게 했다.
어떻게? "이 오렌지 빛 립스틱은 너무 섹시해서 안 돼. 안 그래도 도톰한데 남자들이 네 입술 훔치려고 난리일걸. 이 아이섀도도 안 되겠어. 잊었어? 네 눈이 곧 호수라니까!" 나 참, 영화도 아니고 살다 살다 이런 토 나오는 광경도 간만이네 하였으나 묘하게도 이 커플, 꽤나 예뻐 보이는 것이었다.
그사이 수십 만 원이 우스울 새라 카드 벅벅 긁어대는 커플 여럿 다녀갔으나 달랑 립글로스와 핸드크림을 집어 든 그들을 끝내 주시했던 건 남자의 립 서비스에 제법 혹해서였다. 제 여자에게 그랬듯 남의 여자에게도 거리낌 없이 해대던 말의 권법. 배워야지, 배워야 저 무시무시한 샘플의 양을 챙길 수 있지 않으랴.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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