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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6> 영국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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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6> 영국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

입력
2012.03.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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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52) 미국 뉴스쿨대 정치철학과 교수는 최근 영미학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인문학자 중 한 사람이다. 영국 에섹스대와 프랑스 니스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현상학자 도미니크 자니코를 사사했고 에섹스대 교수, 영국현상학회 회장, 게티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난장의 이재원 편집장은 그를 "영미학계의 젊은 거장"이라고 소개했다. 영국 가디언 등에 서평을 기고하고 수년째 미국 뉴욕타임스의 고정 코너를 담당하는가 하면, 뉴욕 노턴 출판사의 'How to Read~'등 굵직한 인문교양서 시리즈를 총괄책임을 맡고 있다.

크리츨리는 언어학, 기호학에 바탕을 둔 분석철학을 공부한 후 하이데거, 레비나스, 데리다 등 소위 대륙철학자에 천착했다. 국내에 출간된 유일한 저서 <죽은 철학자들의 서> (이마고 발행)를 편집한 이기홍씨는 "영미학계에서는 분석철학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는 철학을 대학의 전문분과 학문으로 취급해 학자 개인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개별적으로 평가한다. 이에 반해 크리츨리는 대륙철학에 천착하며 철학자의 삶을 사유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다"고 소개했다.

박사학위 논문집이자 첫 저작 <해체의 윤리학> (The Ethics of Deconstructionㆍ1992)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데리다의 해체론을 접목했던 크리츨리는 <윤리학, 정치학, 주체성> (Ethics-Politics-Subjectivityㆍ1999)에서 자신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펼쳤다. 그는 이 책에서 종교, 정치에 대한 대중의 실망이 현실참여와 저항의 정치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 역시 기본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실망에 뿌리를 둔다. '종교적 실망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고, 정치적 실망은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며 올바른 윤리학의 요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번 인터뷰는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가 지난달 전화로 진행했다.

-학술서 대표작 중 하나인 <무한하게 요구하기> (Infinitely Demanding, 2007)에서 당신은 정치철학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보여준다. 정치는 당신의 철학에서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하는가.

"철학의 목적은 철학적 사고 자체다. 예술, 윤리, 문학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것처럼 정치도 철학의 대상일 수 있다. 철학은 정치와 역사에 대한 지적인 이해이자 분석이다. 내가 고민하는 철학은 실존적인 구성요소도 있다. 나는 수년간 정치 활동가로 살았는데, 지금도 정치적인 문제에 활동가로 개입하고자 한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철학적인 대답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해체의 윤리학> 에서 나는 나치에 동조한 하이데거의 문제를 해명하며 윤리적인 것이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이라고 주장했다. <무한하게 요구하기> 는 이런 관심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적 실망(disappointment)에서 철학에 대한 요청이 나온다고 말한 것인가.

"종교적 실망과 정치적 실망에서 철학의 요청이 나온다. 실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상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경험에서 실망이 기인한다. 실망은 끝이라기보다, 시작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 시작이 바로 철학에 대한 요청이다."

-<해체의 윤리학> 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통해 데리다의 해체론을 비판했는데, <무한하게 요구하기> 에서는 데리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레비나스가 데리다보다 더 정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나는 레비나스와 사랑에 빠졌다. 레비나스는 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철학자다. 그는 지적인 논의를 전개하지만 또한 수사학적이고 정서적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철학의 본령이다. 데리다의 경우 철학적인 아방가르드였다. 모든 이들이 이해하고자 했던 철학자가 데리다다. 내가 데리다를 통해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도덕적인 개념과 정치적인 개념에 대한 분석이었다. 이를 통해 그 아래에 있는 토대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년의 데리다는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오히려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데리다보다도 레비나스로 나를 이끌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여하튼,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을 질문해줘서 거기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지젝은 <무한하게 요구하기> 를 '자유주의적인 아나키즘'이라고 비판했다. 자유주의와 당신의 정치 전망이 다를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젝이 제기한 논쟁은 너무 구태의연하다.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을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논쟁의 기원은 1차 인터내셔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가 이때 아나키스트를 축출했다. 이로 인해 긴장이라기보다 적대감이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 팽배하게 되었다. 지젝은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하는데, 나는 이런 입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당과 연결된 전위조직이 사회변혁을 주도한다는 발상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연방주의자에 가깝고, 고전적 아나키스트의 정치관을 갖고 있다. 월가 점령 시위에 대한 보도가 한국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운동만 보더라도 지젝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젝은 그 시위 현장에 우연히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지젝이 월가 점령 시위에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다. 월가 점령 시위는 아나키즘적인 운동이었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적인 투쟁이 아니었다. 이슈는 평등이었지만, 전술은 아나키스트적이었다. 지젝이 이런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면, 틀린 것이다. 자유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젝이 말하는 전위적인 지도부도 없이 자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훨씬 복잡하고 민주적인 운동이었다. 이들을 모이게 만든 명분이 운동 자체였다."

-당신의 주장은 자크 랑시에르의 주장과 비슷한 것처럼 들린다.

"랑시에르도 아나키즘의 형식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랑시에르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정치를 '치안'으로 보며 '정치적인 것'(정당, 행정 등 기성 체제를 통한 정치 현상)을 이와 구분한다. 정치의 문제를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나눈 것은 참신하다. 랑시에르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 범주이다. 정치는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는 사람들이 기획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런 기획과 무관한 순수한 정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면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확신이다."

-당신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이런 입장을 취하는가.

"직접적으로 마르크스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를 읽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경제적 환원주의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중요하다. 1844년을 전후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견해는 설득력을 갖는다. 후기 마르크스는 자본을 해체하는 작업에 주력했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은 상당히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기의 마르크스는 정치이론을 누락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다른 이론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경제 분석이 곧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경제 분석을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주장하는 당 이론도 문제다.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당의 역할에 대한 주장도 신뢰하기 어렵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은 당신이 주장해온 상호주의적인 입장(mutualistㆍ인간은 경쟁이 아니라 호혜에 근거해 생명을 유지한다는 입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신은 노동조합운동에도 관여했는데,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인가.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적 전통이기도 하다. 영국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회주의적 전통은 마르크스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에게서도 비타협적인 사회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전통에서도 사회주의를 말한다. 감리교 교회의 활동은 노동자당에 비견할 만했다. 상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분석 같은 것이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회주의적 주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동기부여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것을 단순히 상부구조의 문제로 볼뿐이다. 부차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와 윤리를 관련짓는 것 같은데, 대중이 윤리를 요청하며 기성 정치를 바꾼다고 보는가.

"월가 점령 시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상호주의가 개인주의를 행동으로 이끌었다. 파편화된 개인의 단위가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각자 다른 개인이지만, 함께 행동한다는 상호주의가 작동했던 것이다."

-어떻게 상호주의가 아나키즘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아나키즘은 어떤 대안을 찾기 위해 독립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 같은 정치철학자에게 인간은 나약하고 사악한 존재다. 이런 까닭에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를 통해 개인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아나키즘은 정 반대의 입장이다. 정부가 본질적으로 악이고, 개인은 독립적인 상호주의를 체현하고 있다. 이처럼 아나키즘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내포한다. 인간과 정치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잠재적으로 인간은 상호주의에 근거해서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한다. 아나키즘이 곧바로 정치적 전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당신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해결책 같은 것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아나키즘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월가 점령 시위에서 보듯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대중적인 지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금융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농담에 불과하다. 이런 까닭에 냉소주의가 발생한다. 정부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 민주주의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모두가 이 사실을 안다. 월가 점령 시위는 경제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테이블 위에 올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 정부가 제시하는 것과 다른 무엇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 말한다. 어떤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가.

"자본주의는 위험한 체제다. 1990년대에 이미 역사는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자본주의가 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난무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묘사했던 사회경제적인 삶의 형태는 역사적인 기원을 갖는다. 자본주의는 놀랍게도 효과적으로 이런 사회경제적인 삶을 조직화했다. 물론 불평등하지만 말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금융자본주의는 기괴한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산업생산이 아닌 금융을 통해 돈을 만들어낸다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이런 판타지가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물건을 제조하고 그것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를 무너뜨려버렸다. 서구 사회는 자유시장에 대한 거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유 시장이 대책일 수는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상품의 교환 문제이다. 일종의 등가성이 있어야 교환이 가능하다. 이 등가성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이행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이 과정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리=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

■크리츨리-지젝 논쟁/ 反 자본주의 저항운동 조직화 놓고 2년간 필전

사이먼 크리츨리는 현상학자로 알려졌지만, 지적 토대는 상당히 넓다. 에섹스대 시절부터 노동운동에 참여한 그는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아나키즘으로 눈을 돌린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론에 영향을 받은 조직적 저항운동에는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이는 조직적 저항운동을 강조하는 슬라보예 지젝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2000년대 후반 지젝과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크리츨리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지젝이 2007년 11월 <런던 리뷰 오브 북스> 에 크리츨리의 <무한하게 요구하기> 를 비판하는 서평 'Resistance is Surrender'를 실으며 촉발된 논쟁은, 평론가 T J 클락과 크리스 하먼(12월), 데이비드 그레이버(2008년 1월)의 지젝 비판, 지젝의 재반박(1월)으로 이어졌다. 둘 사이의 비판-반박-재반박은 미국의 패션지 <하퍼스 바자> , 지젝의 저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in Defense of Lost Causes, 2008), <네이키드 펀치> 등을 통해 2009년까지 이어지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논쟁의 요점은 저항운동의 조직화 여부다. 지젝은 자본주의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은 내놓을 수 없지만, 저항운동을 조직화해 단기적 해결책을 축적하며 혁명의 단계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명시적으로 국가 장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 아나키즘 방식의 저항운동은 권력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크리츨리는 "지젝은 여전히 '레닌주의식 중앙집중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되받는다. 그는 자신이 국가권력의 장악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며, 지젝처럼 중앙집권적 정당을 만들어 국가를 직접 장악하려는 시도가 현재에도 유효한가를 되묻는다. 21세기 대중운동은 지도부 없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활동하는 아나키즘적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분석이다.

지젝은 크리츨리의 분석을 '아나키즘의 낭만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크리츨리는 지젝의 관점이 구 좌파 정치적 전략의 재탕이며 현재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꼬집는 것이다.

이택광 교수는 "두 사람의 논쟁은 촛불집회, SNS 정치운동 등 국내 현실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다"면서 "인터넷 정치 활동을 크리츨리식 아나키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긍정적이지만 지젝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책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 난장의 이재원 편집장은 "둘 사이 논쟁은 대의정치의 기능이 의심되는 시대에 '좌파는 다른 형태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느냐'의 문제로 확장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공동기획=이택광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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