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발효로 이제 본격적인 제2 라운드가 시작된다. 4년10개월에 걸친 한미 양국의 줄다리기 협상, 국회 비준을 둘러싼 찬반 대립 등 FTA 준비과정이 1라운드였다면, FTA가 발효되는 15일부터는 수시로 발생하는 통상 마찰과 투자자 국가소송제(ISD) 재논의 등 실전 2라운드가 펼쳐지는 셈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우리의 준비태세는 미흡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ISD를 이용해 자국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론 커크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최근 오린 해치 상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 정부와 제약업체가 협상을 통해 약값을 결정한 후라도 제약회사가 이의를 제기하면 외부 전문가가 약값을 재검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한 추가 입법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분쟁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제약사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약값을 만족할만한 수준까지 올려주지 않으면 ISD도 불사하겠다는 엄포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기업형 슈퍼마켓(SSM) 영업시간 제한 등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제한하는 우리 정부의 정책들도 ISD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도 정부의 대응 태세는 너무 허술한 게 현실이다. 발효 90일 내(6월 13일) 서비스 투자위원회를 열어 ISD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는 원칙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인 논의 내용 및 수준에 대해선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한미 FTA의 독소조항인 ISD의 폐기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정부는 공공정책 침해 등 일부 조항만 논의한다는 입장이어서 ISD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간 ISD 논쟁에 가려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원산지 인정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작년 7월 한ㆍEU FTA 발효 이후 EU 측의 원산지 검증요청이 급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U의 원산지 검증요청은 작년 9월 처음 9건이 제기된 이후 올해 2월 21건으로 다섯 달 새 두 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홍보 부족 등으로 국내 중소업체들은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만약 원산지 기준 위반으로 걸리면 관세혜택 몰수는 물론 상대국 바이어와의 수출 거래가 단절되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이를 예방하려면 정부가 수출 중소기업에 전문가를 파견하거나 컨설팅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정부가 그간의 소극적인 태도를 바꿔 ISD 재협상에 적극 임해야 한다”며 “환경, 경제 등 각종 규제를 담당하는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등에 ISD 예방 가이드라인 등 관련 정보를 바로 전달할 수 있는 체계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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