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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부채와 함께 탈핵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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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부채와 함께 탈핵시대를

입력
2012.03.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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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초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다녀왔다. 히로사키대에서 열린 '자연 방사선 노출 및 저선량 방사선 역학 연구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눈이 많은 지방답게 아오모리 공항부터 숙소가 있는 히로사키 시내까지 도로 양쪽에는 어른 키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시내 도로 곳곳에는 표지판과 자전거가 눈에 파묻혀 실루엣으로만 형체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출국 전에는 처음 참석하는 학술대회라 인구 18만 명의 소도시인 히로사키에서 개최한 이유가 궁금했다. 살펴보니 히로사키대 의학부 보건학과에 방사선 응급의학 연구소와 응급 및 재난 의학 센터가 설치돼 활발한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해온 경험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2010년부터 방사선 응급의학 분야 전문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 성과를 토대로 올해 관련 학술 저널 창간호를 발간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동안 학술대회는 라돈이나 토론에서 방출된 자연 방사선 노출과 관련한 저선량 방사선 역학 연구에 중점을 뒀다. 올해는 일본에서 열린 관계로 특별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다룬 특별 발표가 몇 편 공개돼 주목을 끌었다. 학술대회를 주관한 히로사키대의 도코나미 신지 교수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에 의한 방사선학적 영향을 발표했다. 5,000명이 넘는 주민과 이주민에 대해 방사능 오염 선별검사를 했고, 20 km 이내 지역까지 일시 방문하여 현장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함께 발표했다.

일본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의 요시나가 신지 박사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시 응급 대처와 청소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의 방사선 노출, 건강 영향에 대한 역학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다행히 체르노빌 사고와 비교해 고선량 방사선에 노출된 노동자 숫자는 적었지만, 도쿄전력 직원에 비해 계약직 노동자가 훨씬 많은 방사선에 누적 노출된 결과를 보고하면서 향후 암발생에 대한 추적 관찰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체르노빌 사고를 겪은 유럽 연구자의 발표도 흥미로웠다. 러시아 방사선 위생 연구소의 미하일 발로노프 박사가 체르노빌 사고 이후 새로 얻게 된 방사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후쿠시마 지역의 효과적 복구를 위한 토양 연구 프로그램 등을 제안했다. 독일 연방 방사선 보호국의 페터 보소 박사는 라돈 노출 지도를 작성한 경험을 바탕으로, 후쿠시마 사고 후 유럽 전 지역에 걸친 방사능 요오드 분포 지도를 공개했다. 일본과 달리 유럽의 노출 수준은 미미했지만 결과를 학술대회에서 공개하고 이미 학술저널에도 실리게 됐다는 사실을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학술대회에 함께 참석해 열심히 발표를 메모하던 국책 연구기관 박사에게 한국은 후쿠시마 사고 후 방사능 요오드 분포 지도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 분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매일 같이 여행객과 수산물의 방사능 여부를 조사하느라 준비를 끝내고도 분포 지도를 그리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심지어 국립환경과학원이 방사능 노출에 대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 서로 작성했으나 국정원이 개입해 폐기했다는 의혹이 얼마 전 한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방사선처럼 애써 얻은 정보를 감추려는 시도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그러나 충분히 무너뜨리고도 남는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려다 주최측에서 제공한 기념품을 발견했다. 아오모리 지방 특산품인 쯔가루 연에 그려진 민화가 담긴 부채였다. 겨울에 열린 학회 기념품으로 부채라니, 방사선 건강 영향 연구자의 처지에 대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부채를 펼쳐서 잠깐 부치다보니 핵발전소 단계적 폐쇄 결정을 내린 일본은 전력난으로 올해 꽤나 덥고 습한 여름을 보내게 됐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기념품을 준비한 주최측의 의도와 무관하게 더운 여름을 대비하라고 부채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정부의 탈핵 선언에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핵발전에 집착하는 점이 답답하고 못마땅하다. 작은 실천이지만 올 여름은 이 부채와 함께 탈핵시대를 견뎌내야겠다.

황승식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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