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공항을 향해 달려가던 택시가 미국대사관을 지나는 순간 택시 안에서 구르듯이 중년 부부가 뛰쳐나왔다. 이들은 이내 대사관 안으로 사라져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고, 미국은 워싱턴에 망명처 제공을 약속했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고의 여배우와 감독으로 활동하다 북한에 납치됐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다.
78년 영화 '양귀비' 제작을 협의하기 위해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는 지인들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장정들에 의해 보트에 태워졌다.
공포에 질려 몇 차례 반항하다 마취제를 맞고 정신을 잃은 그녀가 항해 8일 만에 북한 남포항에 도착하니 웬 키 작은 남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내레 김정일입니다."
당시 38세의 나이로 북한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던 영화광 김정일이 환영 인사를 건넨 것이다.
최씨가 실종되자 이 소식을 접한 신상옥감독은 바로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프랑스, 일본 ,동남아 등 세계 각국을 돌다가 6개월 여 만에 빈 손으로 홍콩으로 되돌아 온 신 감독 역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돼 납북되고 만다.
이들이 북한에서 재회한 것은 납치된 지 5년 후인 83년의 일이었다.
북한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김정일의 지시를 거부한 최씨는 5년여의 세월을 가택 연금 상태로 보냈고 탈출을 감행하던 신 감독 역시 정치범 수용소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83년 여름 평양에서 운명적인 재회를 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주선으로 북한 최초의 현대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여의 시간 동안 최은희와 신상옥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은 밀사', '소금', '탈출기' 등 다수의 영화를 제작하며 국제무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85년 신 감독이 연출한 북한영화 '소금'에 주연 배우로 출연한 최은희는 그 해 구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 비록 북한 영화로 출품됐지만 한국인 최초의 여우주연상 수상인 셈이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기회가 생기자 두 사람은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찾아왔다. 8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부부가 북한영화인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3월 13일 북한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스트리아에 들른 이들은 동행한 감시원이 방심한 사이 미 대사관 진입에 성공해 납북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미국에 정착하다 89년 귀국해'마유미'와 '증발' 등을 제작하며 또 다른 영화 인생을 시작하던 이들은 2006년 신 감독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며 최씨만 홀로 남게 됐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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