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강정마을에 들렀다. 모처럼 떠난 제주도 여행 길의 숙소가 서귀포 남원 쪽이었다. 올레 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제7코스 출발점인 외돌개와 가까워 따질 것도 없이 올레 길 탐방은 제7코스로 잡았다. 외돌개 주차장에 렌터카를 세우고 느릿느릿 걸었다. 지역 주민들이 조경수로 팔기 위해 키웠다는 야자수와 선인장이 빚어낸 이국적 정취, 한창 피기 시작한 유채꽃이 구럼비나 귤 나무 등 상록수와 어울려 펼친 색채의 향연에 내내 눈이 즐거웠다.
■ 해안절벽을 끼고 돌아가는 해안트레킹 코스는 길이 험한 만큼이나 볼거리가 가득했다. 화산 분출 당시의 열과 압력이 암벽에 새긴 다양한 색채와 형상은 거대한 추상화였다. 웃다가 울고, 앙가슴을 뜯으며 절규하고, 뱃속을 다 파내어 집어 던진 듯한 고통과 환희의 중첩이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해안트레킹 코스를 벗어나는가 싶자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7코스 절반을 조금 지난 곳, 먼지와 아우성 속에 강정마을이 앉아 있었다.
■ 해군기지 건설은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단계 같았다. 해안 곳곳에 방파제와 항구 건설을 위한 거대한 구조물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며칠째 계속된 발파 작업이 '구럼비 바위' 곳곳을 헤집었다. 반대파와 찬성파가 경쟁적으로 내건 현수막이 어지럽게 바람에 흔들리고, 공사 방해나 찬반 양파의 물리적 충돌을 막기 위한 경찰의 인간방벽이 을씨년스러웠다. 준비 없이 갑자기 혹사를 시킨 다리처럼, 조금 떨어져 바라본 마을에는 '갈등 피로'가 역력했다.
■ 올레 길을 이어주던 시내버스가 끊겨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토박이 기사는 모두 빨리 육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외지 사람들로 밥집은 잘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득 군데군데 새들 차지로 버려진 감귤 밭, 올레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는 폐가가 떠올랐다. 낮은 돌담이 미로처럼 둘러쳐진 서낭당 모습도 중첩됐다. 아직 밝지 못한 갯마을의 삶과 '구럼비 바위' 지키기가 언뜻 풍기는 무속의 기운이 안개처럼 뒤엉켜 피어 올랐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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