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기 전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어떤 영화에 출연했고, 몇 편이나 했지?" 분명 이력이 만만치 않은 젊은 배우인데도 드라마 제목만 입가를 맴돌았다. 자료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2005년 홍콩 쉬커(徐克) 감독의 '칠검'이 최근작, 한국영화는 1997년 '체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중들 머리 속에 스타로 오래도록 자리 잡아온 배우치곤 필모그래피가 빈약했다.
지난 7일 낮 서울 사간동 한 카페에서 김소연을 만나자마자 "너무 오랜만이네요"라는 인사말을 던졌다. 슬쩍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는 "제 또래 배우들이 영화하는 것 보면 너무 부러웠다"고 말했다. 영화에 출연하고픈 마음은 간절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는 의미. 1시간 가량 이어진 대화의 대부분은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 아쉬움이 빚어낸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제 연기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김소연은 신작 영화 '가비'(감독 장윤현)의 개봉(15일)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에서 고종을 위해 일하다 비명에 숨진 역관의 딸을 연기했다. 단이로 태어났으나 따냐로 자란 그녀는 일본의 계략에 의해 어려서부터 사랑을 키워온 조선 청년 일리치(주진모)와 함께 고종(박희순) 독살작전에 가담하게 된다. 가비(커피의 옛 표기)를 즐기는 고종 곁에 다가가면서 단이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고종의 진심을 알게 된다. 단이가 고종을 향한 연민 어린 충심과 일리치와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김소연의 단호하면서도 안정적인 연기가 스크린에 돋을새김한다.
김소연은 너무 일찍 스타가 되어버린 배우다. 1994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얼굴을 알리자마자 시쳇말로 떴다. 스무 살이 채 안돼 지상파 방송 3개 프로그램에 겹치기 출연을 했다. 그 와중에 고등학생인 남녀 주인공의 몸이 서로 바뀌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체인지'로 동년배보다 빠르게 영화 데뷔식을 치렀다. 또래보다 성숙해 보이는 얼굴과 능숙한 연기 덕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 영화들은 자극적이거나 과감한 노출을 원하는 것"이었다. "어른이 돼서 할래요"라고 그는 거절했다. 영화와 너무 일찍 인연을 맺어 인연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셈이다. "그러다 한 7,8년 전부터 제 나이에 하면 좋겠다 싶은 영화가 많아지더군요. '미녀는 괴로워'나 '무방비 도시' 같은 영화는 부럽기도 했고, 스릴러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드라마만 많이 했으니 영화계에선 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봐요."
김소연은 '가비'와 만나게 된 건 "신의 선물"이라고 했다. "개화기를 배경으로 사연 많은 신여성을 연기해 보는 게" 평소 욕심이었으니 당연한 말일 수도. 그는 "'가비'가 사실상 제 첫 영화"라고도 말했다. "'체인지'는 감독님도 방송PD 출신인데다 촬영 현장도 드라마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스케줄에 쫓겨 '칠검'은 정신 없이 제 출연 분량만 찍느라 영화를 즐길 틈이 없었다"고도 했다. "드라마에서 빠른 호흡으로 연기하며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다가 영화에서 긴 호흡으로 연기하는 게 낯설면서도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그는 "예전 제 연기는 너무 미완성이었다"고 했다. "항상 나이에 맞지 않는 (성인)역할을 해서인 듯하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흉내내는 기분이던 예전과 달리 이제야 성숙해진 것 같다"고도 했다. "드라마 '아이리스'로 저를 좋아하게 된 팬들이 저의 과거 작품 보기 운동을 하면 제가 말려요. 예전 연기를 보면 왜 그리 눈에 힘을 줬는지… 그런 저의 단점을 '가비'가 줄여줬어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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