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가 뒤숭숭하다. 영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로 잇달아 곤욕을 치르더니, 이번에는 현직 부장판사가 경찰에 소환되는 전례없는 일이 생겼다. 이른바 기소청탁 의혹 사건이다.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의 남편인 김재호 부장판사가 2006년 서울서부지법 판사로 있을 당시 서울서부지검에 재직하던 박은정 검사에게 나 전 의원을 비방한 네티즌을 기소해 달라고 청탁했고, 박 검사는 이 청탁을 후임 검사에게도 인계했다는 것이 의혹의 골자다.
나 전 의원은 기자회견까지 열고 남편 김 판사의 기소청탁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박 검사가 경찰에 제출한 진술서 내용을 보면 이 말은 믿을 수 없게 됐다. 나 전 의원이 결국 4월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박 검사는 진술서에서 "김재호 판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 내용은 '나경원 의원이 고소한 사건이 있는데, 노사모 회원인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허위사실로 인터넷에 글을 올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사건을 빨리 기소해 달라. 기소만 해주면 내가 여기서…'라는 내용이었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판사와 박 검사는 선후배다. 사법시험이라는 같은 관문을 통과해 사법연수원에서 법조인의 길을 같이 배운 이들이다. 선배 김 판사는 후배 박 검사에게 사건을 빨리 기소해 달라며 그 다음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고, 출산휴가를 앞두고 있던 박 검사는 김 판사의 이런 청탁 내용을 후임 검사에게 전달했고, 그 전달 사실까지 다시 김 판사에게 전화로 알렸다는 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의혹의 윤곽이다.
노사모를 언급한 데서 짐작되는, 김 판사가 자신의 부인인 나 전 의원을 비방한 혐의를 받고 있던 네티즌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가 하는, 정치적 시각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선배 판사가 후배 검사에게 '사건을 빨리 기소해 달라. 기소만 해주면…'이라고 말했다는 부분이다. 그리고 후배 검사는 선배 판사의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다.
법학자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우리 법조계 내부의 이러한 풍토와 법조인들의 의식세계를 '불멸의 신성가족'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했다. 그는 2009년에 낸 같은 제목의 책에서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의 청탁문화를 까발리고 있다. "…이런 청탁문화는 법원ㆍ검찰에 한정된 것은 아니며, 특별히 더 심각하다고 볼 이유도 없습니다. 법원ㆍ검찰도 우리사회가 작동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청탁'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청탁문화에서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법조계도 전혀 예외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경찰의 출석 요구를 받은 김 판사, 휴가를 일주일 연장하기까지 하며 외부 접촉을 끊고 있는 박 검사의 심정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자신의 부인이 억울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선배 판사의 전화에 마지못해 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본질은 바로 그 전화 한 통이다. 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잣대를 가진 신성가족 내부의 청탁 말이다.
다시 김 교수의 책을 인용해 본다. "전화 한 통 걸 데가 없다고요? 우리나라 국민의 85.8%가 여러분 같은 입장입니다." 김 교수는 우리사회에서 법조계 어디에도 청탁 전화 한 통 걸 곳 없는 사람들이 85.8%라는 통계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내 판ㆍ검사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우리가 법조계에 갖고 있는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말을 붙이는 순간, 신성가족은 눈 녹듯 해체될지도 모른다면서.
기소청탁 의혹 사건은 그 전화 한 통이 사법 패밀리 내부에서 그들끼리만 은밀히 걸렸기 때문에 일어났다. 경찰의 수사로 의혹이 규명되고, 신성가족의 집 안도 우리가 좀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사건이 차라리 법조계가 85.8%의 국민들과 좀더 가까워지고, 신성가족이 해체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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