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7일 러시아 MTV 정치토크쇼 '고스데프'에 출연한 반정부 인사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등 현 정권에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대선을 한달 앞두고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던 러시아 정부는 방송 한 주 만에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전문가들은 이 결정이 사회자가 유권자들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출연한 반정부 인사들의 비판보다 푸틴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어린애로 희화한 그림의 티셔츠를 입은 사회자 복장이 관료들의 심기를 더 자극했단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해 러시아 정ㆍ재계 파워인물 1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크세니야 소브착(30)이 문제의 사회자다.
소브착은 러시아의 '패리스 힐튼'이라는 별명답게 수년째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는 방송인이다. 러시아 3대 재벌이자 이번 대선(4일)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미하일 프로호로프와 2007년 5일간 결혼생활을 한 뒤 이혼하기로 약속한 '시한부 결혼'은 그의 유명세의 신호탄이었다. 금발에 팔등신 몸매인 그는 2010년 여성암 예방 캠페인 일환으로 누드를 촬영하며 여성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 최고 대학인 모스크바대 국제정치전공 이력 등이 더해지면서 소브착은 지난해 10월 러시아 월간지 의 '러시아 독신 남성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성'설문조사 1위를 차지했다.
이전까지 러시아의 사교계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가 올해 대선 기간 반 푸틴 세력 선봉장으로 나섰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19일 소브착이 푸틴 3선 저지운동의 아이콘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말 러시아 총선 부정선거 논란 때부터 반 푸틴 대열의 중심에 선 그는 자신의 방송프로그램과 트위터 등을 통해 정부비판 발언을 이어갔다. 지난달 26일에는 3만명 가량이 2시간 동안 모스크바 시내중심을 둥글게 감싼 '인간띠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푸틴의 대선 승리가 확정된 5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리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도 참가하고 있다.
이 같은 행동은 그의 성장배경 등을 볼 때 이율배반적이다. 그의 아버지는 푸틴의 고향이자 러시아 제2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990년대 시장을 지낸 고 아나톨리 소브착이다. 푸틴의 대학 은사였던 그는 동독에서 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활동을 하던 푸틴이 독일 통일로 업무공백이 생기자, 푸틴에게 시정업무를 맡기며 푸틴을 처음 정계로 이끈 정치 멘토다. 푸틴은 2000년 소브착 전 시장이 사망하자 장례식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소브착의 어머니도 푸틴의 도움으로 상원의원까지 지냈다.
하지만 소브착의 과거행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푸틴식 정치를 혐오해왔는지 알 수 있다. 소브착은 2006년부터 '자유운동'을 벌여왔다. 모든 것을 검열받아야 하는 러시아의 검열·획일주의를 가감 없이 비판하는 모습은 성장배경 등을 이유로 그를 의심하던 반 푸틴 세력들을 점차 그의 주변으로 끌어들였다. 나아가 사생활부터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자유를 누릴 권리를 찾자고 부르짖는 그의 모습에 공감을 한 지식인과 젊은이 등 일반인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소브착은 푸틴의 승리로 끝난 대선 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선 이후에도 진행될 반정부 시위는 물론 푸틴 정권의 새로운 6년에 대한 그의 각오이다. 푸틴 정권이 앞으로 그의 옷차림 하나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