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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해를 품은 달', 상상의 역사와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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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해를 품은 달', 상상의 역사와 로맨스

입력
2012.03.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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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품은 달'이 이번 주 스페셜로 편성되었다. 그럼에도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MBC 내부 문제로 결방의 아쉬움은 있지만, '해를 품은 달'의 인기는 여전하다.

지난 몇 해 동안 대중문화 현상에 주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는 역사적 상상력의 확장이다.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들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선에서 역사적 상상력의 코드에 기대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 어찌 보면, 역사란 '과거에 대한 사실' 자체가 '역사의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사실들' 중에서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선택하여 일정한 질서로 배열함으로써 성립되는 담론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를 다루는 대중문화 현상에서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상상력은 역사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사실(史實)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대중은 역사적 과정이나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특수성과 재미에 더 관심을 느끼고 있다.

'해를 품은 달'은 역사드라마지만 상상력은 완전한 허구에 기대어 있다. 기존의 역사드라마도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인물들은 역사기록 속에서 존재해왔었다. '해를 품은 달'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조선 초기인지 중기인지 모호하다. 성수청(星宿廳) 논란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초기에서 중기 사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해를 품은 달'에서 역사적 배경은 드라마의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배경일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 단지 모호한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술이 나오거나, 연우가 죽었다가 살아나도 드라마의 내적 사실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아마도 현대극이었다면 '해를 품은 달'과 같은 이야기 전개는 황당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배경으로서의 역사는 로맨스를 위한 장치로서만 기능한다. 1980년대 정사(正史) 중심의 '조선왕조500년' 시리즈에서 역사는 배경이 아니라 전경이었다. 90년대 후반 이후 역사드라마의 경우, 배경으로서의 역사는 로맨스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민족문화를 보여주는 기제였다. '허준', '대장금', '상도', '서동요', '이산', '동이' 등에서 나타난 배경으로서의 역사를 통해서 시청자는 내의원, 수라간, 개성 상인 송상(松商)과 의주 상인 만상(灣商), 백제 태학사, 도화서, 장학원 등 다양한 우리 역사의 문화유산들을 경험했다. 그러나 '해를 품은 달'에 나오는 성수청은 아름다운 문화유산의 재현이 아니라 로맨스 판타지를 위한 설정일 뿐이다.

로맨스에서 중요한 것은 두 등장인물의 우연한 첫 만남이다. 궁궐에서 나비를 매개로 세자 훤과 연우의 첫 만남은 그들의 사랑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부분 로맨스에서 두 등장인물은 수많은 방해자들을 만난다. 가능하지만 이루어지기 힘든 연인들은 신분과 환경의 차이,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꼬일 수밖에 없다. 훤과 연우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무자비한 권력의 음모다. 사랑이 공감을 넘어서 상대의 안으로 들어가는 감정이입이라면, 훤과 연우의 사랑은 서로의 내면으로 들어간 낭만적 사랑이다. 반면, 양명군의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이타적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현실에서 우리가 꿈꾸는 사랑은 '해를 품을 달'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낭만적 사랑과 자기희생적인 이타적 사랑일 것이다.

최근 많은 역사 서사물들이 실록에서 주변 정황의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지만, 그 궁극의 목적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의 진실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역사적 사건이 이야기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귀신이 실재 존재해서 귀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 이야기가 있어서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런 역사인식을 불편해하겠지만 대중이 배경의 역사 속에서 상상과 로맨스를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역사코드인 듯하다.

주창윤 서울여대 방송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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