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영화로 세계적 성공을 거둔 <해리 포터> 에는 주인공의 숙적으로 어둠의 마왕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볼드모트지만 마법사 세계에서 그 이름은 금기사항이다. 그래서 그는 본명보다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로 불린다. 마법사들은 다 볼드모트를 알지만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고 굳이 그 기다란 별명으로 부른다. 물론 그의 이름을 읽을 줄 몰라서가 아니다.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해리>
시리즈의 첫 권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을 읽었을 때, 그러니까 영화화되기 전이라 볼드모트의 캐릭터가 영상화되지 않았을 때, 내 머릿속에는 오래전의 인물이 볼드모트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떠올랐다. 30여 년 전 청소년기의 내게는 볼드모트와 같은 어둠의 마왕이 있었다. 해리>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친구나 가족과 같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방안에 혼자 있을 때조차 박정희라는 이름 석 자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굳이 발음하려면 박정희로 끝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붙여야만 했다. 그때 나는 대통령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반감도 별로 없었다. 나는 사회의식이 투철한 학생이 전혀 아니었고,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낌새를 보고 그저 대통령을 전부 다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느낌만 가진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꿈에서조차 대통령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마법사들이 볼드모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두려워했듯이 나는 대통령을 전혀 모르면서도 몹시 두려워했다. 한마디로 청소년 시절의 나는 박정희에게 가위눌려 있었다.
흔히 박정희는 경제적으로는 큰 업적을 올렸고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과오를 남겼다고 평가된다. 그에게 한 점 더 얹어주는 사람이라면 경제적 업적이 정치적 과오를 상쇄한다고 여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은 없었을 거라고, 고속도로도 놓았고 절대빈곤도 해결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직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많고, 그의 딸이 여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의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실패는 서로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바탕에는 바로 사회공학적 마인드가 있다. 바로 그것이 나를 괴롭혔던 정체 모를 두려움, 그 가위눌림의 근원이었다.
나는 박정희가 권력욕에 물들었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의 진짜 잘못은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를 인위적이고 획일적으로 편제하고 가공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은 데 있다. 그것은 마치 기계를 조립하는 것처럼 사회를 조립해 특정한 기계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공학적 신념이다. 당시 그 신념은 사회의 모든 힘을 일사불란하게 결집시킬 수 있었고, 그 결과가 경제적 성과와 정치적 독재라는 분리될 수 없는 쌍둥이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정치와 경제는 달라졌으나 현재의 정권도 그런 사회공학적 마인드에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남자가 머리를 기르면 퇴폐적으로 보는 70년대의 사고방식은, 유행가 가사에 술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21세기의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먹고 살게 되었으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냐는 70년대 정권의 오만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자유롭게 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시간 만에 간다면 사회가 발전한 게 아니냐는 21세기 정권의 무지와 통한다. 국토의 훼손을 건설이라고 보는 중대한 착각의 근본적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
사회를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사회공학적 신념은 언뜻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듯싶지만, 정치권력의 관점에서 벗어난 모든 요소를 희생시키며, 사회를 심각한 상상력의 부재, 마비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보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나 경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문학적, 역사적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권위주의가 거세된 지금,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는 사라졌으나 그 유령은 아직도 주위를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ㆍ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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