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때 전기톱으로 사람 가슴뼈를 자르는 국내 여의사 숫자는 11명이다. 대한흉부외과학회에 따르면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을 가진 전국 33명의 여성 가운데 6명이 어른 심장을, 5명이 어린이 심장을 수술하고 있다. 이삭(39)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외과 교수는 그 6명 중 한 명이다.
이 교수가 갈아 끼우는 심장 판막은 1년에 170~180개, 대동맥 수술은 30~40건. 언제 응급수술이 있을지 몰라 잘 때도 휴대전화에 귀를 쫑긋 세운다. 자다가 불려나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일상이다. 매일 생사를 오가는 환자와 사투를 벌이면서 목이랑 어깨 근육은 남자처럼 단단해졌다. 팔뚝 굵기는 그의 표현대로 "장난이 아닐" 정도다.
이 교수와 함께 2004년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다른 두 여의사는 이제 더 이상 메스를 들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교수는 그런 고단한 삶의 주인공으로 여전히 산다. 남은 삶도 계속 그렇게 살 거란다. 의학도 시절 꿈꿨던 가장 '의사다운 의사'는 외과의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새 삶을 선물하는 의사
"선생님 덕분에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아요."
이 교수가 수술에서 깨어난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다. 그를 계속 수술방에 붙잡아두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수술하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70대.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처럼 병원으로 실려왔던 어르신들이 딸 같고 손녀 같은 이 교수 손을 붙들고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새 삶을 살게 해줘 연신 고맙다 하는 바로 그 순간 때문에 이 교수는 손에서 메스를 놓을 수 없다.
"얼마 전엔 여든 넷 할아버지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던 대동맥이 터지는 바람에 한밤중에 실려오셨어요. 최악의 응급상황이었죠. 연세도 많으신데다 이미 피가 혈관 밖으로 많이 흘러나온 터라 생명이 위험했으니까요. 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중환자실에 한 달 이상 계셔야 할 것 같았고…."
의료진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 보통은 보호자도 환자도 수술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의외로 침착하게 수술에 동의했다.
"그날 밤을 수술방에서 꼬박 새웠어요. 대동맥 중 파열된 부분을 잘라내고 인조혈관을 끼워 넣었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혈압이 높은 것 말고는 큰 지병이 없어서 수술이 잘 끝났어요. 요즘엔 통원치료 하시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겠다고 제게 다짐까지 하셨어요."
선배 못지않은 막내
이 교수는 하지만 "이 할아버지처럼 응급상황인 대동맥이나 심장 환자들을 다 살리진 못한다"고 했다. 특히 인체의 생명줄인 대동맥 수술은 순간순간이 전쟁이다. 우리 몸에서 가장 큰 혈관인 대동맥은 심장과 직접 연결돼 있어 산소를 포함한 혈액을 온몸에 공급해준다. 이곳이 갑자기 터지거나 찢어지면 사망률은 80~90%에 이른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출혈 때문에 쇼크에 빠져 수술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요즘엔 심장 환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을 동반한 경우가 많다. 당연히 수술도 더 쉽지 않다.
대동맥이나 판막 등 심장 관련 수술 땐 보통 인공심폐기를 쓴다. 진짜 심장을 잠시 멈춰놓고 이 기계로 피와 산소를 온몸에 순환시키며 심장과 폐 기능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심장혈관외과의 수술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심폐기를 오래 쓸수록 수술 후 뇌나 간 콩팥 등 다른 장기에까지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손상된 판막을 인공판막으로 바꿔주는 수술은 인공심폐기 작동 시간이 보통 1시간 정도다. 하지만 대동맥 수술에선 2, 3시간은 써야 한다. 그만큼 위험도 크다. 결국 얼마나 수술을 빨리 하느냐가 성공 여부를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외과 교수진 중 막내이지만 수술 속도는 여느 선배들 못지 않다.
"빨리 결정하고 빨리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요(웃음). 수술이 어렵다 해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죠. 10~20년 전에 비해 국내 심장혈관 분야 수술 성적은 두세 배쯤은 좋아졌습니다. 사망도 합병증도 점점 줄고 있고요."
연 180개 판막 교체
'러닝 피리어드(learning period).' 외과의사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배움의 시기다. 초보 집도의로서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환자나 보호자를 대하는 방법도 처음 경험하는 기간이다. 이 교수 역시 혹독한 러닝 피리어드를 보냈다.
"환자가 잘못되는 걸 보면 '이 환자를 나 아닌 다른 선생님이 수술했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죠. 또 수술 후 원인 모르게 환자가 나빠져 나 자신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호자에게 설명해야 할 때 의사로서 너무나 힘들어요."
이 기간을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수술 경험을 많이 쌓으며 실력뿐 아니라 자신감을 다지지 않으면 집도의로서는 낙오?수밖에 없다. 이런 심적인 스트레스에다 일주일에 7시간 자는 살인적인 스케줄까지 떠안아야 하는 흉부외과를 요즘 의학도들은 기피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의외로 담담했다.
"힘들지만 보람 있는 생활에 매력을 느끼는 후배들이 분명 있을 거에요. 비행기에서 갑자기 환자가 생겼을 때 응급처치 제대로 못하는 의사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기본을 못하면 의사가 아니라 테크니션이라고 해야겠죠."
이달부터 새로 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에 합류한 전공의 3명 중 2명이 여성이다. 홍일점이던 이 교수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힘든 진료과를 피하는 경향은 오히려 남자 후배들이 더한 것 같아요. 외과 와서 독하게 똑 부러지게 일하겠다는 여학생이 눈에 많이 띄거든요. 과거엔 나이 든 남자 의사를 선호하는 환자들이 많았어요. 젊은 여자라고 저한테 수술 안 받겠다는 환자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요. 여의사라 더 편하게 대하는 환자를 많이 만났으니까요."
■ 이 교수 심장혈관병 일문일답
"대동맥 부풀면 2년내파열"… 평소 증상 없어 정기검진 중요
Q. 가슴 부여잡고 갑자기 쓰러진 환자에게 해야 할 응급조치는.
A. 고혈압이나 동맥경화가 있는 사람이 가슴이나 복부, 허리, 등의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지면 대동맥류나 대동맥박리일 가능성이 높다. 대동맥 일부가 찢어지는 대동맥박리는 발병하면 1시간마다 사망률이 1%씩 증가하는 초응급 상황이므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없다. 빨리 흉부외과가 있는 병원으로 이송해 수술 받는 게 최선이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던 대동맥(대동맥류)이 터져도 수술 말고는 방법이 없다. 환자 혈압이 낮다면 다리를 최대한 올린 채로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Q. 동맥경화 환자는 다 대동맥류나 대동맥박리 위험이 있나.
A. 동맥경화가 있다고 모두 대동맥류나 대동맥박리가 생기진 않는다. 혈압이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하고, 서구적인 식생활을 피하며, 적당한 운동과 금연을 실천하면 위험을 낮출 수 있다. 위험이 높아져도 평소엔 특별한 증상이 없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게 중요하다. 건강한 대동맥은 지름이 약 3cm다. 6cm가 넘으면 1년 안에 50%가 터지고, 일단 증상이 생기면 2년 안에 파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빨리 치료해야 한다.
Q.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는.
A. 특히 운동할 때 숨이 많이 차다. 보통 때도 종종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아프다고 느낀다. 금방 피곤해지고 자주 어지럽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거나 나이가 많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이런 경험이 있다면 심장이나 대동맥 질환을 의심해보는 게 좋다.
Q. 심장 상태를 확인해볼 수 있는 자가진단법은.
A. 혈압이 정상인지 맥박이 규칙적인지 속도는 괜찮은지 얼굴이나 다리가 자주 많이 붓지는 않는지 목 부위 혈관이 늘어나면서 튀어나오지는 않는지 등을 확인해보면 된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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