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2학년 학생이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쳤다 퇴학된 서울의 한 외국어고(본보 7일자 12면 보도). 고3 학부모들은 한 학생의 일그러진 행동에 안타까워할 겨를도 없이 내 자녀가 받았을지 모를 불이익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한 재학생 가족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중위권이던 해당 학생이 갑자기 상위권이 됐고, 영어시험 시작 10분 만에 엎드려 잤는데도 만점을 받는 등 석연치 않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파다했다"며 "USB로 복사해간 답안지를 몇 명이나 돌려봤는지 조사된 바가 없다"고 개탄했다. 이 학교 당시 교장은 "학부모들의 피해의식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소위 명문고에서 교사와 교장이 가담한 부정행위가 속속 적발된 현실을 감안하면 학부모들의 불신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대입에서 내신 비중이 커지자 특수목적고 자율형사립고 등의 내신압박이 더욱 심해지며 이처럼 부정행위가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1문제 차이로 대학 레벨 바뀐다"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특목고 자사고 등의 내신경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신에 방점을 둔 수시모집 비중이 지난해 60%까지 확대됐고, 서울대는 올해 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제 비율을 80%로 확대하는 등 내신이 중요해지면서 자사고, 특목고의 분위기는 전쟁터가 되고 있다.
서울 소재 외고 3학년 A군은 "어떤 과목은 시험이 쉬워서 아무도 1등급을 못받고, 어떤 과목은 한 문제만 틀려도 등급이 달라진다"며 "매 시험 1~2문제 차이로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의 레벨 자체가 달라져 학생들이 무척 민감하다"고 말했다. 임성호 하늘교육 이사는 "서울대 합격자의 77.6%가 학교 내신 1~2등급"이라며 "특히 EBS 연계에 따라 수능이 쉬워지고 외국어영역 만점자가 2만명에 육박하면서 특목고생의 수능 프리미엄이 모두 사라져 학생들이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특목고 수능 강세는 사라지고, 불리한 내신은 심해지니 그만큼 이들 학교 학생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설명이다.
불리한 내신을 감당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도난 사고가 난 외고에서는 2010년 29명이 전학했고, 11명이 학업을 중단하고 검정고시 등의 길을 택했다.
너나없이 도덕적 해이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고교 내신전쟁이 걷잡을 수 없는 도덕적 해이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형사처벌 대상인 시험지 유출에서 학생부 학생발달사항 수정까지 부정행위 종류도 다양하다. 지난해 서울 모 자사고에서는 교감이 1학기 기말고사 시험지를 학교운영위원장의 자녀에게 유출한 사실이 알려져 학부모 반발이 일었으며, 엄연한 불법인 학생부 수정은 안 하는 학교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2~3월 서울지역 30개 고교를 대상으로 학생부 작성 및 관리상태 특정감사를 벌인 결과 조사대상 자사고 12곳 중 9곳이 학생부 부당수정을 지적받았고, 특목고는 13곳 중 11곳이 적발됐다. 이 중 한 학교는 행동특성 종합의견란에 "외향적이고 직선적이나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함"이라고 적힌 2학년 담임교사의 의견을 "리더십이 있으며 목표의식이 뚜렷하여 항상 노력하려고 합니다"고 바꿔 적었다가 적발됐다.
이번 시험지 절도 사건도 빈번한 시험지 빼돌리기, 답안지 수정 등 교육계 비리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김창환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치열한 입시경쟁 압박감 속에 살면서 학생이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명문대 진학이라는 목적을 꼭 이뤄야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입시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 즉 우리사회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인섭 숙명여대 교육학부 교수는 "수시모집과 입학사정관제 확대의 본래 취지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을 높이 평가해서 고교를 정상화하자는 것"이라며 "현재 대부분 대학이 내신 지필고사 성적만 지나치게 강조해 그 취지가 왜곡되고 있는 만큼,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적성위주 평가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