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 감독의 신작 영화 '화차'를 봤다. 미야베 미유끼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행복을 갈구하는 평범한 인물이 범죄와 살인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악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기에 영화는 더욱 공포스러웠는데, 나는 그 이유를 따져보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후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떠올렸다. "악한 일은 대부분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깊이 생각하지 못함'이라는 평범한 오류에서 발생한다. 나, 당신,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니, 공포스럽지 아니한가!
깊이 생각함은 언제나 악을 모면케 하는가? 하긴 "장고 끝에 악수"란 말은 있지만 "숙고 끝에 악수"란 말은 없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사람은 오래 생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도대체 얼마만큼 깊이 생각해야 하는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적인 사람인가? 도덕적인 사람인가? 그렇다면 미국의 연쇄 살인범 중에는 고학력자가 왜 그리 많은가? 우리나라 정치인, 고위 관료, 재벌 인사 들은 왜 그리 말도 안 되게 부패하고 비도덕적인가?
우리는 또한 '선'의 이름으로 일어난 수많은 전쟁들을 잘 알고 있다. 미군이 수행한 아프카니스탄 테러전의 작전명은 본래 '무한정의'였다. 선인은 악을 거부하지 않는다. 선인은 악을 행한 후 악인보다 조금 더 미안해 할 뿐이다. 막스 베버는 공익을 수호한다는 정치인의 파우스트적 숙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관여하려는 사람, 즉 권력과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에 관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악마적 힘과 거래를 하게 된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해 보면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
선하고 잘난 사람들도 악을 저지르는 마당에 깊이 생각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따지고 보면 일상생활에서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산책을 하다 발아래 꽃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꽃을 피해 발을 내디디는 게 보통이다. 그때 걸음을 멈추고 '흠, 고민이군. 이 꽃을 밟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라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웃기는 사람이다. 별 생각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정상적인 것 아닌가?
일상생활에서 깊이 생각해야만 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까? 있다. 아니 이 시대에는 너무 많다. 우리가 꽃을 밟냐 마냐, 혹은 앞사람을 밀치냐 마냐를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은 산책할 때가 아니라 급히 달려가야 할 때다. '화차'의 여주인공은 생계의 벼랑 끝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자신과 처지가 같은 이를 죽이고 그 사람 행세를 했다. 이때 그녀가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대단한 성찰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나와 같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화차'를 보면서 관객들이 낮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여유 시간에 우리는 비슷한 영혼을 서로 나눠가졌다는 단순한 진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극장문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질주한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매 순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선악의 기로에서 둘 중 하나를 무심코 선택하면서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악이란 망각의 선택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장담컨대 그 종착지의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심보선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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