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계절이 있는 세상의 끝.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의 국경이 겹치는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에서 러시아의 콜라반도에 이르는 너른 땅을 라플란드(Lapland)라고 부른다. 이 지역 원주민인 사미(Sami)족은 한 해를 여덟 조각으로 나눈다. 지금은 그들의 말로 '기다달브'라 부르는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조각의 일 년으로는 번역되지 않는 시간이다. 순록떼가 눈 덮인 침엽수림에서 나와 번식처로 긴 여행을 시작하면, 라플란드의 첫 번째 계절 기다달브가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다른 차원의 시간과 자장(磁場), 사람들이 존재하는 땅. 북극해에 닿은 이 세상의 북쪽 끝을 여행할 땐, 그래서 달력의 숫자 따윈 잊어버리는 게 좋다. 참, 라플란드에서 북쪽(사미어로 '다비')은 나침반의 자북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안 쪽으로'라는 뜻이다. 반대로 남쪽('룰리')은 '해안에서 멀리'라는 뜻.[1]
핀란드 라플란드주(州) 주도 로바니에미. 거짓말 좀 보태면 명동만큼 일본인 관광객이 붐빈다. 그러나 핀란드라는 나라는, 특히 우리로 치면 강원도쯤 될 라플란드는 아직 한국인의 발길이 무척 뜸한 곳이다. 왜일까. 입국 심사대에서부터 번번이 일본인 취급을 받으며 그게 궁금했다. 설마 저 사람들이 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미도리(카타기리 하이리)처럼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핀란드여서"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닐 텐데…. 영화배우 아사노 타다노부를 쏙 빼닮은 호텔의 일본인 가이드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우린 서로 모국어가 달랐다. 하지만 짧은 핀란드 여행이 끝날 무렵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 듯하다. 그 얘긴 나중에.
헬싱키에서 기차로 10시간, 또는 비행기로 80분 가량 나침반의 빨간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북극권(Arctic Circleㆍ하지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지지 않는 경계선)을 통과한다. 북위 66도 32분 35초를 따라 그어진 이 선이 라플란드의 남쪽 경계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북극권을 넘는 순간이다.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 흐르는 세상의 꼭대기, 라플란드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건. 영어로 된 가이드북엔 유독 '원더(Wonder)'라는 단어가 많았다. 2월과 3월에 걸친 주, 밤이 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일조시간은 서울과 비슷했다. 기온도 영하 15도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원더는, 그러나 역시 눈이었다.
"건설(乾雪)이에요. 만져보면 눈 같지 않죠?"
라플란드의 눈은 4월부터 녹기 시작한다. 적설량은 ㎝보다 m로 표기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 그런데 질퍽거리는 느낌이 없다. 눈길 자동차 사고도 거의 없단다. 현지 가이드는 "핀란드 눈에 습기가 없어 그렇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눈이 압력밥솥으로 지은 찰밥 같다면 이곳의 눈은 냄비에 안쳐 푸슬푸슬한 메밥 같다. 걸터앉아도 바지가 젖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풍경이 가능한 듯. 지평선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전나무 숲, 가지는 물론 바늘잎 하나하나, 심지어 수직으로 선 둥치에도 목화솜을 덩이째 뜯어서 풀로 붙인 듯한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지 못하고 쌓여 있다. 동트기 전 또는 박모의 시간, 나무들의 푸르스름한 실루엣은 깊은 사연을 간직한 설인의 무리처럼 다가왔다.
무진장의 눈과 독특한 풍경 덕에 라플란드는 (온대지방 기준으로) '겨울' 레포츠의 천국이다. 노인들 보행기에도 바퀴 대신 스키 날이 달려 있으니 다운힐이나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그냥 일상의 풍경. 전투경찰 진압복처럼 생겨먹은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도시는 이른 아침부터 복작거렸다. 단체관광객의 방한복이다. 허스키가 끄는 썰매나 스노모빌을 타고 달리는 순백의 사파리, 두꺼운 얼음에 시추공 같은 구멍을 뚫고 하는 낚시를 이달 말까지 즐길 수 있다. 로바니에미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진 항구도시 케미에서는 쇄빙선을 타고 나가 해빙 사이에서 수영도 할 수 있다. 눈과 얼음으로 지은 호텔과 레스토랑들도 4월까지 영업을 계속하다가 말 그대로 '눈 녹듯' 사라진다.
진압복 틈바구니에서 떠든 경험보다는 세상의 끝에서 살아온 사람의 얘기가 여운으로 남았다. 케미 외곽 순록 농장에서 만난 사미족 목동과의 대화에서, 기계문명의 시침과 분침을 여읜 시간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암컷 순록이 새끼를 잉태했을 때, 북극 뇌조가 알을 품을 때, 연어가 회유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들의 새로운 계절은 시작된다고 했다. 이런 곳에 전설이 깃들지 않다면 이상한 일. 핀(Finn)족이 우랄 산맥을 넘어오기 전부터 라플란드는 숱한 신과 동화가 태어나고 사라져간 땅이다. 그런데 핀란드인들은 몇 십 년 전부터 이곳이 산타클로스의 '공식적인 주소지'라고 우긴다. 산타클로스에게 보내는 편지가 일 년에 60만 통 넘게 도착한다니, 이젠 그렇게 믿을 도리밖에 없어 보였다.
다시 일본인 얘기. 흰색과 파란색만으로 가득한 세상, 옷차림과 세간붙이와 집과 거리의 디자인까지 온통 미니멀(minimal)한 풍경에 며칠 젖어 있으니, 일본어의 '탄레이(端麗ㆍ단정하다, 예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단순하고 깔끔한 것을 곧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심성에 이곳 라플란드의 자연과 사람이 더없이 황홀하게 비치는 게 아닐까. 휘황한 볼거리와 범박한 유흥을 찾는 한국인도 여행의 참맛을 알게 될 때, 이 세상의 끝을 향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Once upon a time in the North(옛날옛날에 이 북쪽 세상에서)…'[2] 그런 얘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여덟 개의 계절이 존재하는 세상의 시간이 그때까지 모두 흘러가 버리지 않기를.
로바니에미ㆍ케미=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불붙은 여우꼬리가 하늘에 불꽃 뿌려놓은 듯… 오로라 '넋 잃은 황홀경'
라플란드는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날아온 플라스마가 지구 자기장에 부딪쳐 생기는 현상이다, 라고 사전엔 나와 있지만 이곳 라플란드에선, 눈 덮인 언덕을 뛰어다니는 불 붙은 여우의 꼬리가 하늘에 뿌려놓는 불꽃이다. 직접 오로라를 보러 나서는 길엔 물리학보다 오래된 전설에 끌리게 된다. 누구나 오로라를 한 번 보고 나면 남은 일생이 훨씬 행복해진다니까.
두 가지를 함께 챙겨봐야 한다. 일기 예보와 오로라 예보. 날씨만 맑아 준다면, 이달 말까지 이틀에 한 번 꼴로 천공을 무대로 펼쳐지는 장엄한 우주의 춤사위를 볼 수 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오로라 예보는 알래스카 페어뱅크대 지구물리학연구소 홈페이지(www.gi.alaska.edu/auroraforecast)에 있다. 대륙별로 오로라가 관측되는 띠 모양의 권역(aurora oval)과 10단계(레벨 0~9)로 예측한 활성도를 게시한다. 레벨3 이상이면 오로라를 볼 확률이 매우 높다.
천문 현상이니만큼 오로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도심의 불빛을 벗어난 곳으로 가야 한다. 북극에 가까운 라플란드의 밤은 매우 춥다. 방한 장비를 꼼꼼히 챙겨 떠나야 한다. 로바니에미를 비롯한 라플란드의 주요 도시엔 교통편과 저녁식사, 캠프 시설 이용 등을 결합한 오로라 투어 상품을 판매한다. 가격은 70~120유로 정도다. 스노모빌을 타고 밤새 야생지대를 달리며 오로라를 만나는 상품도 있다. 차를 빌려 아무도 없는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게 물론 제일 좋다.
로바니에미 도심에서 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교외 호숫가. 찾아간 날은 날이 궂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수평선 끝까지 얼어붙은 호수는 얼음 사막과 같이 적막했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경계로 자작나무와 전나무의 숲이 길게 뻗어 있었다. 오로라를 기다리며, 정말 오랜만에 대책 없는 낭만으로 포만했던 것 같다. 오로라는 사미족의 말로 '구오브사하스', '들을 수 있는 빛'이라는 뜻이다.
로바니에미=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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