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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 곳] <15> 천명관 소설의 변두리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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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 곳] <15> 천명관 소설의 변두리 극장

입력
2012.03.0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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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 금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구경을 했다. 커다란 스크린에선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며 총을 쏘기도 하고 마차 뒤에서 남녀가 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영화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을 가진, 미국(美國)이란 먼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금복은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과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너무 생생하고 두려운 나머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래> , 78쪽)

마흔 살 늦깎이 소설가로 2003년 등단하기 전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지망생으로 살아왔던, 그리고 아마도 그 이종(異種)의 경험을 밑천으로 2000년대 첫 10년간 발표된 한국문학 작품 중 최고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고래> (2004)를 쓴 천명관(48)씨.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성 3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현실과 비현실을 무람없이 넘나들며 신화풍으로 그려낸 이 소설은 “소설에 대해 우리가 가져온 기존의 상식을 보기 좋게 비켜섰다”(소설가 임철우) 혹은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에 빚진 게 없는 작가”(소설가 은희경)라는 문단의 찬탄을 자아냈고, 지명도 높은 작가도 기록하기 힘든 10만권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중 독자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렇기에 천명관의 ‘그곳’은 당연히 충무로일 거라고 꽤나 자신있게 짚었건만, 그는 이런 짐작을 머쓱하게 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제가 영화를 처음 시작한 것은 충무로 시대가 저물고, 신씨네ㆍ기획시대 등 젊은 기획자들이 대기업과 손잡고 막 출발을 하던 때였습니다. 짧은 종로 시대를 거쳐 결국 자본을 좇아 모두 강남으로 진출했죠.”

하여 충무로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그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삼류극장을 다루면 어떨까 싶습니다. 소위 동시상영관이라고 하는 변두리 극장은 저에게 충무로 못지않고 매우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개인적으론 삼류인생들의 휴식처였던 그 공간이 제 소설의 테마와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 “지금 남아있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이란 단서와 함께 학창 시절, 그러니까 1970, 80년대 자주 드나들었던 청량리, 답십리 일대의 재개봉관ㆍ동시상영관들을 길게 나열했다. 동일ㆍ경동ㆍ오스카 등 두세 자의 단정한 이름을 가진 이 극장들은 그러나 한 곳도 남아있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삼류인생들의 고단한 삶을 뒤로 한 채. 서울 전역을 수소문해봐도 사정은 마찬가지. 궁여지책, 시내에서 여전히 손그림 간판을 걸고 있는 거의 유일한 극장인 서대문아트홀(옛 화양극장)을 찾았다.

#2

인터뷰를 위해 마주앉은 천씨, 담배부터 꺼내 문다. 그가 두 번째 장편 <고령화 가족> (2010)을 냈을 때 본 게 마지막이니 꼭 2년 만이다. 어색한 인사치레가 오갈 틈도 없이 극장에 처음 갔던 때를 묻는 질문부터 이른바 ‘대하 구라’로 불리는 필력에 버금가는 그의 입담이 터진다. “초등학교 때죠. 아니구나.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갔어요. 가설극장이 있었거든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내사면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저희 ○○흥업에서 준비한 영화는 ‘○○○○’입니다. 아, 눈물 없는 볼 수 없는 영화…”

40년쯤 전 늦가을 용인의 농촌 마을. 가설극장 설치를 알리는 용달차가 동네방네를 돌면 추수가 끝나 고즈넉하던 마을이 들썩댄다. 변사의 목소리로 전파되던 극장 광고 문구를, 천씨는 토씨까지 빼놓지 않고 읊는다. 얼굴에는 소년 시절의 희열까지 되살리면서.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1년에 한 번, 쌀쌀한 바람이 불 때쯤 들어와요. 벼 베고 공터가 된 논에다가 천막 치고 스크린을 걸죠. 이모, 삼촌들 틈에 끼어 구경하러 가는데, 아직 초등학생이 아니면 입장료를 안 받으니까 업혀서 들어가죠. 그땐 6학년까지는 초등학생이 아니었어요.(웃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영화 시작되고 나서 천막 들추고 몰래 들어갑니다. 박노식 김희라 같은 유명 배우도 나오는 반면에 정체 불명의 배우들도 많았어요. 한국 사람인데 러시아 모자 쓰고 나오고 말 타고 평원을 달리기도 하고…. 한마디로 국적불명의 영화들이었죠.(웃음)”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 말하자면 삼류 영화들이었지만 그는 “정말 흥분됐었다”.

흥분, 스스로 말하기는 “요즘 같으면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분류됐을 만한 명랑함”을 타고났다는 그는 취학 후 학기 중엔 “애들 엮어서 놀러가고 집에 데려와서 라면 끓여먹고” 하는 골목대장으로 살다가 방학이면 친척 집을 돌며 서울에서 지냈다. “할아버지께서 용인에 땅을 사놓고는 아버지를 내려 보내셨거든요. 뜻하지 않게 농사를 짓게 된 우리 부모님을 빼면 친가, 외가 친척들이 모두 서울에 있었어요.” 방학만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광진교를 건너 서울로 들어서기를 거듭한 덕에 천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당시 서울 풍경이 생생하다. 저마다 카바이드등을 켠 채 어깨를 잇대고 있는 노점상, 눈이 내릴 때마다 연탄재를 까는 통에 새까만 길거리…. 이어 시골로 회상의 공간을 옮겨온 그가 봉당에서는 어떤 풀이 자라나는지, 초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 색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한다. 구수한 추억담의 막간에 한마디 슬쩍, 무심하게 걸친다. “기억이 없으면 쓸 수가 없죠.” 동안(童顔)으로 가려지지 않는 오십 평생의 관록을 살짝 엿본 느낌이다. 그는 시골과 도시를, 군부독재ㆍ산업화ㆍ민주화운동을 동시에 경험한 자기 또래들이야말로 “한 사람 안에 다양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세대”라면서 그것이 자신의 문학적 자산임을 자부한다.

아무튼 소년 천명관의 극장 순례 역시 서울에서 보낸 방학 때의 일이다. 어린 날 자기 마음이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 사로잡히게 된 사정을, 아마도 그는 자신이 창조한 여걸 금복의 영화 구경 장면을 빌려 고백한 게 아니었을까.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다 봤다”는데, 그가 말하는 ‘영화’는 외국 영화, 구체적으론 할리우드 영화다. “한국 영화는 안 봤어요. 당시 쿼터제라고 해서, 정부가 한국 영화 4편을 만든 영화사에 외국 영화 1편 수입권을 줬어요. ‘빠삐용’이고 뭐고 외화는 들여오는 족족 돈이 되니까 그런 조치를 한 건데, 한국 영화는 사실상 외화 수입하려고 만드는 거니까 얼마나 날림이었겠어요. 한국 영화의 침체기였죠. 정부도 그걸 의식해서 영화제에서 상 받으면 수입권 하나를 줬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문예영화라고, ‘물레방아’ ‘뽕’ 같은 영화들이에요. 반공 영화도 1편당 1편 쿼터를 줬고.”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음악은 “촌스러운 가요 대신 팝송”, 천씨는 당시 본격 도입되던 서구 대중문화에 흠뻑 취했는데, 그러느라 자신의 성적이 58명 중 58등이라는 사실조차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3

“금복은 그간 자신이 필생의 꿈으로 삼고 있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공장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극장을 짓는 일이었다. 오래 전, 칼자국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 단숨에 눈과 귀를 사로잡혔던, 울음이 날 만큼 두려웠지만 차마 헤어나고 싶지 않았던 날카로운 흥분,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죄책감에 온몸이 오그라들었지만 한편으론 영원히 멈추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바랐던 희열. 어둠 속에서 울려나오는 그 웅장한 소리와 생생한 화면을 그녀는 평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래> , 230쪽)

천씨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성적이 어정쩡하거나 집안형편이 어정쩡해 대학은 근처에도 못가고, 어정뜬 나이 때문에 군대에도 못 가고 취직도 못 한 채” 빈둥대기도 하고 막노동도 했던 고교 졸업 직후의 생활은, 읽고 있자면 애틋해지는 자전적 단편 ‘이십세’(2007)에 묘사돼 있다. 공군에 자원해 서둘러 시작한 군 생활에서 그는 처음으로 문학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제가 있던 부대 정훈실에 황석영 김지하 리영희 백기완 선생 같은 분들의 책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것이 그때가 바로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치하였거든요. 지금 기억으로는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소위 불온서적들도 있었고,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김지하 선생 시집, 또 고은 선생의 전집도 있었고요. 심지어는 광주항쟁 기록집인 황석영 선생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도 그때 봤어요. 대학 서클실도 아닌 보안사 요원들이 왔다갔다하는 살벌한 군대 정훈실에 그런 책들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얘기 같지만 사실이에요. 어쨌거나 그 책들 덕분에 저는 군대에서 의식화가 돼서 나온 특별한 케이스가 되었죠.(웃음)”(문학평론가 류보선과의 인터뷰에서)

제대 후에는 골프용품점 점원,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가 “인생에서 제일 재밌었다”고 추억하는 시절. “젊고 돈을 벌 때니까요. 게다가 책상에 앉아 있는 일도 아니었고. 그때는 영화도 안 보고 책도 안 읽었던 것 같아요. 일하랴 놀러 다니랴 바빴고 왜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한편으론 쓰디쓴 경험이기도 했죠. 처음 사회에 나와서는 ‘세상이 이런 것이었나’ 실감하는.”

그 생활은 채 10년을 못 채우고 끝이 났다. 서른 무렵 군대 동기였던 영화감독 장동홍씨의 사무실에 발을 들이면서 말이다. 개봉관에 이어 재개봉관, 마지막으로 동시개봉관을 거치며 수없이 상영된 탓에 화면도 소리도 조악해진 필름으로 영화를 보면서도 마냥 행복했던 시네마 키드는 이로써 스스로 영화를 만들어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들 꿈을 꾸는 영화인으로 재탄생한다. 그가 감행한 인생의 대전환은, 안락한 인생을 보장해줄 벽돌 공장을 밀쳐두고 가슴에 아로새겨진 영화에 대한 추억과 갈망을 좇아 커다란 고래 모양의 극장을 짓겠다고 나선 금복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장 감독이 준비하던 전태일을 소재로 한 영화 시나리오를 연습 삼아 썼다가 “야, 이건 영화 다섯 편 분량이야”라는 칭찬인지 힐난인지 모를 평을 듣고, 아무튼 그걸 계기로 영화사에 취직해 각색도 하고 잡일도 하다가, 영화 ‘총잡이’(1995), ‘북경반점’(1999)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때 잘 나가는 작가 대접을 받다가, 그럼에도 자기 대본을 직접 연출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거듭되는 좌절 속에 점점 낭인이 되어가는 그의 영화판 인생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지인 앞에서, 기자 앞에서 수도 없이 복기했을 이 쓰디쓴 인생사를 단조로운 목소리로 또 한 번 읊조리던 그의 눈이 잠깐, 아마 저도 모르게 빛나는 순간이 있었으니. “처음 각색하고 스크린에 걸린 작품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3)이었어요. 그때 돈으로 150만원을 받았는데, 보험 외판할 때 번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지만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생각해보세요.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어요.”

#4

“나의 등 뒤를 돌아본 삼촌은 원정을 발견하고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원정도 삼촌을 향해 다가왔다. 두 사람은 관객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서로를 향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길 위에 레드카펫은 없었지만 그 장면은 마치 영화제 시상식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그날의 주인공은 관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우뚝 멈춰 서서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면회실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나의 삼촌 브루스 리> 제2권, 367쪽)

서정주 시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마흔 해 동안 천씨를 키운 건 팔할이 영화였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사실 등단 후에도 한동안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그의 소설을 키운 것 또한 팔할이 영화였을까.

천씨의 이력에 비춰볼 때 그의 소설은 영화적 문법을 적극 차용했을 것이며 그래서 기존 한국문학과 다르다는 평가를 듣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할 법하지만(실제 그런 식의 비평도 적지 않다), <고래> 를 시작으로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2007)과 <고령화 가족> , 지난달 나온 세 번째 장편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목록에서 그런 짐작을 충족할 만한 요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고래> 의 경우 그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단문의 문장과 고풍스러운 한자어부터 저잣거리 비속어까지 적재적소의 풍성한 어휘는 물론, 신화풍의 내러티브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알레고리화할 줄 아는 노련함이 여느 본격문학에 못지않다. 요즘 한국 소설 중 간혹 출현하는, 이른바 ‘소설의 3요소’인 주제, 구성, 문체보다는 ‘시나리오 3요소’인 해설, 지문, 대사가 두드러지는, 그래서 각 장마다 신(scene) 넘버만 붙이면 그대로 영화 대본으로 써도 무방하겠다 싶을 만큼 노골적으로 영화적 문법을 차용하는 작품과 비교해 본다면 천명관 소설은 그야말로 ‘소설’에 가깝다.

본인의 생각은 어떨까. 사실 그는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떠올리는 이야기는 대개 영화화될 수 없는 것들” “영화 일을 할 때도 영상보다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등의 말로 여러 차례 자기 변호를 해왔는데, 재차 자신의 소설에 삼투된 영화적 요소를 따져 묻는 질문에 난감해 하다가 문득 말을 꺼낸다. “내 소설에 황당한 이야기가 가끔 나오잖아요. 정통소설은 본래 개연성을 중시하다 보니 인물의 행동 폭이 좁은데, 나는 종종 그런 걸 벗어나곤 한다는 걸 잘 압니다. 삼류영화가 그렇잖아요. 진지하다가도 엉뚱하고 돌발적이고 장난기 있고 막장스러운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 폭넓은 이야기를 내 소설이 닮은 것 같아요.” 그는 악동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 안토니오 카사노(AC밀란)의 말을 빌려 자신을 규정한다. “나는 ‘타고난 익살꾼’인 것 같아요. 계속 이런 방향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영화의 세례 속에 성장기를 거쳤고 영화와 지지고 볶으며 장년기를 보냈던 그이기에, 그의 소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영화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거기엔 영화를 통해 눈뜬 그의 미감과 예술관이 반영됐을 테고, ‘병적으로 명랑했던’ 그의 이야기 본능을 일깨운 영화의 힘이 깃들어 있을 테고, 삼류극장을 전전하며 즐기거나 견뎌온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테고, 무엇보다 영화판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불살랐던 한 남자의 인생이 녹아 있을 테니.

하여 신작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의 피날레가 심히 ‘영화적’으로 읽히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화려하던 여배우 시절에는 언감생심, 그저 멀리서 사모할 수밖에 없었던 원정을, 그녀가 세파 속에 상처 입고 늙은 후에야 품에 안게 된 왕년의 삼류 액션배우 삼촌은 바로 작가 천씨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그러니까, 영화를 향한 푸르른 구애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여정에서 깊고 넓어진 인생을 끌어안고 이제는 문학 앞에 선 중년 작가의 페르소나 말이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고래>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소감에서)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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