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권력에는 사계절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듯 권력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는 뜻이다. 정치 권력의 부침과 연관된 말은 다양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ㆍ권세는 10년을 넘지 못한다)도 있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ㆍ열흘 붉은 꽃이 없다)도 있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인 한국에서는 사계절 비유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임기 첫해가 봄이라면 2년 차는 여름이고, 3년 차 이후는 가을과 겨울로 이어진다. 권력의 겨울은 4년 또는 5년 차에 어김 없이 찾아온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뒤 역대 대통령은 임기 말에 심각한 레임덕(권력 누수)현상에 시달렸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모두 예외 없이 임기 말에는 리더십 붕괴로 인해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다. 친인척 및 측근 비리, 국정운영 실패, 대통령 지지율 추락 등이 겹치는 바람에 '식물 대통령'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요즘 차디찬 겨울을 맞고 있다. 며칠 전 이 대통령은 청와대로 언론사 정치부장들을 불러 날씨 얘기를 하면서 "아직도 찬 바람이 불지만 봄 기운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계절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할 수 있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것이다.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과 측근ㆍ친인척 비리 등이 겹치면서 이 같은 상황을 초래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지난해 가을 내곡동 사저 의혹이 불거진 뒤부터 권력의 겨울을 맞게 됐다.
역대 대통령들의 레임덕 현상은 왜 오는 것일까. 갖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권의 핵심 인사들이 권력의 4계 현상을 잊고 처신했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하산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지냈다면 오만과 실책은 줄었을 것이다.
권력의 봄날에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지 않고 독선ㆍ독주식 국정운영을 하면 더 힘든 겨울을 맞게 된다. 또 취임 직후부터 엄정한 인사를 하지 못하고 권력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임기 후반기에 측근 비리가 잇달아 터져 나오게 된다.
4계 현상은 한달 여 앞으로 다가온 4 ∙11총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선거 판세도 항상 요동치기 때문에 봄날을 맞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덧 가을, 겨울로 접어들게 된다. 선거에서는 상대와의 경쟁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자만하지 않고 실수를 줄여야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 나갈 때 조심하라" "오버하는 쪽이 진다" 등의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야권통합을 통한 신당 창당 이후 상승세를 타다 최근 하락세로 돌아선 첫째 이유도 고개가 뻣뻣해졌기 때문이다. 공천 개혁을 외치면서도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받은 임종석 사무총장 등을 공천해 논란을 빚었다. 공천 과정에서 계파 갈등도 증폭됐다. '총선 이후 여소야대가 될 것 같다'는 분석들이 나오자 민주당은 "집권하면 ○○정책을 폐기하겠다"는 정부 정책 뒤집기 공약을 쏟아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폐기하겠다는 주장은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모바일 경선에 도취한 상황에서 불법 선거인단 모집 의혹 사건도 터졌다.
민심은 서서히 야권에 등을 돌렸다. 어느새 MB 대 반(反)MB 전선은 박근혜 대 노무현 구도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기세가 오른 새누리당은 5일 현역 의원 30여명을 탈락시키는 2차 공천자 명단을 확정했다. 겉만 보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라이벌인 정몽준 이재오 의원 등을 공천해서 '화합' 모양새를 갖췄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친이계 학살'임이 분명하다. 새누리당이 다시 거만해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36일 뒤 개표할 때 봄날을 맞으려면 오히려 지금은 가을, 겨울 때처럼 지내야 한다. 선거는 오만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김광덕 정치부장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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