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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우리 안의 '봉사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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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우리 안의 '봉사 DNA'

입력
2012.03.0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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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살, 나이를 더 먹었다. 해마다 나이를 먹어가며, 예전과는 달라진 스스로를 느낀다.

서른 즈음의 봄날, 몇 해 동안 매일 오고간 출퇴근길의 개나리 무리를 난생 처음 본 양 감탄한 날이 있었다. 철이 든다는 말이 계절의 절기를 깨닫는다는 말이라 하니, 내가 철이 들었다면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국악이 들리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무렵이었다. 20대 때는 운전 중에 어쩌다 라디오에서 국악이 나오면 서슴없이 채널을 돌리곤 했었는데, 판소리가 들을 만 했다. 심지어 아쟁소리에 귀를 기울이게도 됐다.

나이 드니 조심성도 많아졌다. 한 때 '덜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릇을 깨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 것이다. 최근에는, 작가 최인훈의 인문학적 사유들을 모아서 엮은 책 도 읽어냈다. 지금 보다는 한창 총기 좋았을 대학생 시절 강의 시간에는 알아들을 수 없던, 최인훈 교수의 그 유명한 DNA(타고난 유전정보인 DNA 이외에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문명 유전정보)의 장대한 이야기들을 이제야 이해케 된 것이다.

친구들도 비슷한 말들을 한다. 나잇살이며 주름이며 겉모습이야 퇴보됐는지 몰라도, 속은 저마다 예전보다 지금이 나아진 것 같다 한다. 나이 듦이 이런 거라면 늙는 것도 괜찮다 너스레를 떤다. 그런 친구들이 어여쁘다.

나와 가족, 친구 정도로 좁혀져 있던 시야가 보다 넓어진 것도 변화 중 하나다. 통의동에 갤러리 문을 처음 열고부터 뭐 할 일이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동네 어르신들 영정사진을 찍어드릴까, 인근 대안학교나 장애아동 학교를 위해 무슨 할 일은 없을까. 아직 이렇다하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생각만은 계속 궁굴리는 중이다. 지역사회에 잘 깃들어보겠다는 계산속보다는, 몸 안에 숨어있다 나이 들면 활성화되는 '봉사 유전자' 같은 게 따로 있지 않나 여긴다. 또래 친구들이나 지인들 역시 나이를 먹어가며 혈연 너머로까지 마음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보아 온 때문이다.

약국을 하는 친구 내외는 수익의 일부를 꼬박 꼬박 '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라는 단체에 후원금으로 보낸다.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이들을 위해 안락한 집을 지어주는 일을 하는 비영리 NGO단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약국을 지키느라 직접 집을 짓는 봉사활동을 나가지는 못하지만, 후원금 보내기만은 빠뜨리지 않는 눈치다. 유년시절에 유독 혹독히 겪었다는 '집 없는 설움'을 나이 들어 그렇게 되갚는 것이다. 부부가 자전거 동아리에 가입하더니 사이도 좋아지고 몸매도 좋아진 또 다른 친구 내외는 동남아 어느 빈민촌 어린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서 보냈다고 했다. 자기 아이의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대신 아프리카의 빈민 가족이 자립할 수 있도록 아동구호 NGO단체인 '세이브 더 칠드런'을 통해 니제르의 가정에 염소를 사서 보낸 지인 가족도 있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겨서,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 것만은 아니다. 한 친구는 대학생 때나 하는 걸로 여겨지는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을 작년부터 시작했다. 한 주 내내 식당에서 홀과 주방을 오가며 음식 서빙을 보는 게 그 친구의 일인데, 일요일 하루 쉬는 날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다. 세계 영유아를 살리기 위해 털모자를 직접 떠서 보내주는 '신생아 살리기 모자 뜨기' 캠페인에 참여하느라 봄이고 여름이고 손에서 대바늘을 놓지 않는 지인도 있고, 유기견들의 위탁모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선배 언니도 있다. 종교가 있으면 자신의 종교 안에서, 반려동물을 좋아하면 그 취향 안에서, 몸이든, 돈이든, 시간이든 무언가를 나누어 쓰고자 하는 것이다. 찾아보면 '쓰일 일'이 꼭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본다.

어느새 다가온 봄, 갤러리 앞 산수유나무도 곧 DNA의 지시에 따라 송글송글 노란 꽃을 틔울 것이다. 우리 안의 봉사 유전자도 더 활활해지지 않을까.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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