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시사회에 가기 꺼려지는 시절이 있었다. 스크린에선 피비린내가 가득했고, 단말마의 비명과 뼈 부러지는 소리가 귀를 파고 들곤 했다. 잔혹 스릴러와 액션 스릴러, 범죄 스릴러 등 영화사들이 단 수식어는 각기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엔 핏빛 가득한 스릴러들이었다. 2008년 2월 '추격자'가 예상을 뒤엎는 흥행에 성공하면서 충무로는 스릴러를 병적으로 탐닉했다.
전직 경찰이 복면을 쓰고 검사와 판사를 단죄하는, 공포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영화가 나왔고('무법자'), 식인이 간접 묘사된 작품('악마를 보았다')도 상영됐다. 2010년 흥행 왕좌에 등극한 '아저씨'도 끔찍하고도 잔혹한 스릴러였다. 금세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의 원빈이 영웅적인 주인공을 연기하지 않았다면 아마 환불 요청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추격자' 이후 스릴러는 충무로의 대세였다. 극장 매표소에서 "정말 이 영화 보실 거냐"고 되묻는 풍경이 연출될 정도였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지만 극장을 찾을 때마다 매번 피 냄새를 맡아야 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유행에 편승해 한 몫 챙기려는 저급한 영화들이 적지 않아 불쾌했다. 한 영화 관계자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스릴러냐"고. "요즘 로맨스를 다룬 시나리오가 많이 돌기 시작했으니 아마 시장 분위기가 곧 바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영화 관계자의 예측이 뒤늦게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지난해 연말 공포영화와 로맨틱코미디의 장르적 특징을 배합한 '오싹한 연애'가 300만 관객을 넘더니 지난주 개봉한 '러브픽션'이 상영 5일만에 100만 고지를 넘어섰다. 사랑 이야기에 목말랐던 관객들이 적당한 웃음으로 달콤한 정서를 전하는 영화들에 환호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가장 주목 받은 신인 이제훈과 아이돌그룹 미쓰에이의 수지가 주연한 사랑영화 '건축학개론'이 22일 개봉할 예정이어서 충무로의 로맨스 시장은 더욱 뜨거워질 조짐이다.
영화인들은 "멜로나 로맨틱코미디는 가장 흥행시키기 어려운 장르"라고 말하곤 한다. 대중들의 평가가 야박하고 관객 수의 한계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로맨스 영화의 성공은 그래서 환영할 만하다. 한국영화의 주력 상품들이 다양화될 수 있다는 방증이니까. 여러 영화들의 흥행을 등에 업고 유사 상품들이 또 끝도 없이 쏟아진다면 물론 반대하겠지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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