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을 봤다. 남자들의 영화였고, 욕설의 영화였으며, 무엇보다 칼의 영화이기도 했다. 칼 한 자루 없는 집이 없고 칼 한 자루 손에 쥐어야 엄마만의 밥상도 완성되는데 주방을 빠져나온 칼이라 함은, 그 주인이 엄마가 아닐 때의 칼이라 함은 어쩜 이리도 무기로밖에 기능하지 못할까.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 여름, 웅성거리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누군가와 시비가 붙은 아빠가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내 차 자리에 네 차를 댔으니 빼달라는 게 아빠의 요지였는데 한참 아래 연배의 상대가 반말에 욕을 지껄였던 것이다. 주먹다짐 같은 건 애초에 모르고 산 아빠, 그걸 아는 네 명의 어린 딸들은 눈이 찢어지도록 상대를 째려보느라 바빴거늘, 그 순간 훌러덩 웃옷을 벗어버린 아빠. 그러고는 흰 러닝셔츠마저 벗어 올리더니 제 얼굴을 가려버린 아빠.
아, 저거! 총각 시절 상사의 부부싸움을 말리다 남편이 휘두른 식칼에 맞아 배에 크게 한 줄 칼자국을 새기게 된 아빠. 어쨌거나 상대가 알아봐야 겁도 집어먹을 텐데 어둑어둑 날 저물기 바쁘던 찰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네 아버지. 엄마의 주선 아래 아빠와 상대는 어느새 집 앞 슈퍼 파라솔 아래 앉아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맥주잔에 술 따르기 여념 없었다. 그리고 시작된 아빠의 흉터에 얽힌 이야기. 몇 번째 리바이벌이냐고? 참아야지, 그 덕분에 세상 나와 칼 구경을 다 했는걸!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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